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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티쳐학원 | 등록번호: 762-94-00693 | 중고등 영어 | 수강료: 30(중등), 33(고등), 3+4(특강)

THE BL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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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3 0:999 수완 120\d | Since 2005 블루티쳐 영어학원, 임희재 | wayne.tistory.com | 01033383436 | 제작일 190807 13:55:48


MEANINGmean3

✈︎ 수완 1200

1. biologist 생물학자
2. confronted ① 직면하다 ② 앞길을 가로막다
3. enterprise ① 기업 ② 사업
4. entries ① 들어감 ② 입장권
5. entry ① 진출 ② 가입
6. ephemeral ① 단명한 ② 덧없는
7. ethical ① 윤리의 ② 도덕의
8. handy ① 편리한 ② 도움이 되는 
9. investigation ① 조사 ② 연구
10. legal ① 법적인 ② 법률상의
11. numerous ① 수많은 ② 다양한
12. trusted 신뢰받고 있는
13. viewed ① 견해



✈︎ 수완 1201

1. appreciation ① 이해 ② 감사
2. expand ① 확대하다 ② 확장하다
3. mold ① 주형 ② 곰팡이
4. sculpture ① 조각하다 ② 조각품
5. similarities ① 비슷함 ② 유사점



✈︎ 수완 1202

1. enthusiasm ① 열정 ② 열광
2. matches ① 성냥 ② 도화선
3. outcomes ① 결과 ② 성과
4. sake ① 위함 ② 이익
5. satisfaction ① 만족 ② 충족
6. uncertain ① 불확실한 ② 불투명한



✈︎ 수완 1203

1. anthropologists 인류학자
2. emphasize ① 강조하다 ② 힘주어 말하다
3. illiterate 문맹
4. literate ① 읽고 쓸 줄 아는 ② 학식있는
5. medieval 중세의
6. neglected ① 방치된 ② 무시된
7. oral ① 입의 ② 구두의
8. transcriptions ① 필기 ② 발음 기호로 옮기기



✈︎ 수완 1204

1. batteries ① 전지 ② 일습
2. cognitively ① 인식에 의해 ② 인지적으로
3. colonies ① 식민단 ② 식민지
4. consumption ① 소비 ② 소비량
5. demand ① 요구하다 ② 수요
6. desperate ① 필사적인 ② 절실한
7. dimensions ① 크기
8. distant ① 먼 ② 원격의
9. electronic ① 전자기기 ② 전자의
10. emissions ① 배출 ② 방출
11. generation ① 세대 ② 시대
12. impact ① 영향 ② 충격
13. industrial ① 산업의 ② 공업의
14. minerals ① 광물성인 ② 광물을 포함하는
15. overlooked ① ~을 못 보고 넘어가다 ② 바라보다
16. productivity ① 생산성 ② 생산력
17. resource ① 자원 ② 부
18. spatial ① 공간의 ② 공간적인
19. standards ① ·질·등급 등에 있어서의) 표준 ② 원기
20. stocks ①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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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주제별 읽기2019. 8. 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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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임기 1962년 3월 23일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국무총리 최두선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최규하 전임: 윤보선후임: 최규하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매장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본관 고령 

[학력]
 육군대학 정당 민주공화당 부모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배우자 김호남, 육영수 자녀 아들: 박지만, 딸: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종교 불교 군사 

[경력]
 복무 만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4년 ~ 1945년 1945년 ~ 1963년 소속 민주공화당 최종계급 만주국군: 중위대한민국 육군:대장 지휘 5사단, 육군정보학교, 7사단, 제2군사령부 참전 중일 전쟁제2차 세계 대전여순 사건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던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후진국 탈피와 경제자립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위로 하락하였다. 

목차 1 대통령이 되기 이전 1.1 

[생애]
 초반 1.2 청년기 1.2.1 교사 생활 1.2.2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재학 시절 1.2.3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2.4 만주국군 복무 1.3 광복 직후 1.3.1 광복과 귀국 1.3.2 광복 직후 1.4 한국전쟁 이후 2 대통령직 수행시 2.1 5·16 군사정변 2.1.1 5·16 군사 정변 초기 2.1.2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1.3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2.1.3.1 통화개혁 2.2 제3공화국 2.2.1 5대 대통령 후보자 2.2.1.1 사상 검증 의혹 2.2.1.1.1 원용덕의 반론 2.2.2 제3공화국 초기 2.2.3 베트남 전쟁 파병 2.2.4 한일협정 전후 2.2.5 3선 개헌과 유신전야 2.2.6 김신조사건 1.21 사태 2.2.7 교육, 문화 정책 2.3 제4공화국 2.3.1 10월 유신 직후 2.3.2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2.3.3 새마을 운동 2.3.4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2.3.4.1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2.3.4.2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2.3.4.3 코리아 게이트 사건 2.3.5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 2.3.6 미국과의 관계 악화 3 사망 3.1 최규하 추도사 3.2 암살 배후 의혹 3.3 장례식 4 주요 정책 4.1 경제 정책 4.1.1 부동산 정책 4.2 외교관계 4.2.1 통일관 4.3 핵개발 추진 4.3.1 비밀 플루토늄 도입 기도 4.3.2 미국과의 갈등 4.4 베트남 전쟁 파병 5 사상과 신념 5.1 종교적 편력 5.2 남조선로동당 활동 6 사후 영향력 7 평가 및 논란 8 약력 9 



 대통령이 되기 이전 

[생애]
 초반 1917년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청년기 교사 생활 1936년 4월 1일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가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만주에 있었던 것을 빼면 확인된 것은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까지 올라갔으며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이 판결은 무죄가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임을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 3부에서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재학 시절 박정희의 혈서가 실린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를 친일행위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국군에 들어가려고 했다. 박정희가 쓴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의 혈서 부분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혈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교사생활을 한 유증선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이나 그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해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두둔하였다.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헌병 조장 시절의 박정희, 이때의 계급은 일본 헌병 조장, 보직은 수습사관이었다. 그해 8월에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만주국군 복무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 있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복무하던 시절 독립군이 만주에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위치한 충칭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하였다. 하지만 좌파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걸 거부하고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박정희가 복무한 1944년대에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이에 대해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는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신여대 김명호 교수 또한 독립군이 "팔로군과 신사군의 지도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고 주장하였다.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한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2-3개월후 단장 부관으로 승진햇기 때문에 일선부대에서 빠지게 된다.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 계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도히로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시완 기자는 2012년 12월 5일 인터넷 매체 '빅뉴스'에 올린 글에서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 이며 "이 사전 초판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 고 지적했다. 또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는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배속된 23사단 72연대 연대장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는 김병태 교수의 주장은 허구성이 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국군 보병 8단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 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일제강점 35년간 창씨개명을 2번한 사람은 '일본인이 되지 못하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극렬 친일파 이영근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박정희가 일본 냄새가 짙은 이름으로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또,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광복 직후 광복과 귀국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라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 커녕 호통을 들었다 는 설도 있다. 광복 직후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 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 백선엽, 여순사건 재판 당시 남조선 로동당을 배신한 그를 살려주었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보는 앞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자원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과 동거를 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박정희의 신당동 사가. 5·16 쿠데타 당시 여기에서 거주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6군단 부군단장 시절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당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 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용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대통령직 수행시 5·16 군사정변 이 부분의 본문은 5·16 군사정변입니다. 주한 미군 총사령부를 방문, 멜로이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5월 20일, 장도영과 함께 중앙청 광장에서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5·16 혁명 공약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 예하 여단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초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대통령 윤보선민주당 신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묵인한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 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외 폭력배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 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으로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쿠데타는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했다.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계엄사령관이자 초대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해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50만 환, 의친왕비 김 씨에게는 30만 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 씨와 삼축당 귀인 김 씨에게는 각각 10만 환 등 모두 100만 환을 지급하였다.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961년 11월에는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12월 학사 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 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1963년 대장 예편한 박정희 박정희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 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 전 대표만 결단을 내린다면 ‘자명·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1962년 12월 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하나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 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일축했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통화개혁 이 부분의 본문은 통화개혁입니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 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연이은 연계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돈을 일정 비율에 따라 증권으로 강제 전환함에 따라 중공업 육성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교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통화 개혁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는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검은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은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철회를 강요받았으며, 자금 융통이 제약을 받아 중소기업 가동률이 50%로 떨어지는 등 경제난까지 야기하여 거두어 들이고 실패하게 된다. 제3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제3공화국입니다. 5대 대통령 후보자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 김희덕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 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사상 검증 의혹 1963년 10월 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 호외에 실렸다.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 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을 비롯하여 민관식,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 대구 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고 하였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 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두 사람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 원용덕의 반론 원용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원용덕은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 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 밑 문주리 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 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3공화국 초기 1964년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 방공포병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일협정 전후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 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김신조사건 1.21 사태 1·21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호전성이 드러나고 반공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 등을 수립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제4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10월 유신 직후 이 부분의 본문은 10월 유신입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 국군의 날 행사 때 박정희 초상을 나타낸 카드섹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 참석하여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대통령 박정희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연설대 아래로 피했던 박정희는 다시 나타나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계속하였다. 범인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의 대한민국 입국과 총기 입수를 도운 일본인 전직 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새마을 운동 새마을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이용해 농촌 가옥을 개량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라는 시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의 전문이다. “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 ”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1973년 제 25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진에 참가한 박정희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코리아 게이트 사건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 YH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망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건입니다. 부마 항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1세로 사망하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설가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 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 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최규하 추도사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최규하 추도사 전문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암살 배후 의혹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장례식 10월 27일 새벽 국무총리 최규하는 긴급히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 문제를 물었고 27일 아침에야 박정희가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공식 보도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결정되었고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 장례식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규하에 의해 진행되고 11월 3일까지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시신은 석관에 안치되어 운구차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육영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주요 정책 경제 정책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 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부동산 정책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있었지만 시장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 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 외교관계 박정희 대통령과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 통일관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 개발 후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핵개발 추진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 사이에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괌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 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초 닉슨 대통령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광둥 성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 고정하였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멸망의 길을 걷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비밀 플루토늄 도입 기도 박정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 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 미국과의 갈등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자주 국방이 나중에 민족 자주권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 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 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는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국자들이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핵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해 10월에 암살당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사상과 신념 종교적 편력 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 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 12월 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 남조선로동당 활동 목사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직급을 박탈당하였다가 복귀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했다. 사후 영향력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 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공화당과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서영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가 충돌했다. 친이계와 김영삼은 연일 영남지역주의와 박정희 집권기를 비판하며 친박계를 공격했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역 정치권과 친박계는 반발했다. 박근혜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력히 주창하는 데는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선친의 유훈’의 영향이 있을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돌이라는 평가도 있다. 평가 및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 및 논란입니다. 약력 1917년 11월 14일 - 박성빈과 백남의의 5남 2녀 중 5남으로로 출생 1926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1932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1936년 -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1937년 - 장녀 재옥 출생 1938년 - 부친 박성빈 사망 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1942년 - 신징 군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1944년 -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1945년 -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1946년 -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1946년 - 10월 대구폭동 중 셋째 형 박상희 사망 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1949년 -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1949년 - 모친 백남의 사망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소령으로 복직 1950년 - 11월 김호남과 이혼 1950년 - 12월 육영수와 결혼 1955년 -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 육군대학교 졸업, 제7사단 사단장 1959년 -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냄 1960년 - 1월에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둘째 형 박무희 사망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킴 1961년 5월 18일 -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1961년 7월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2년 - 3월 22일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 7월 겸임 내각 수반 1962년 - 아르헨티나와 외교 시작 1963년 -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1963년 -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 1963년 -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임금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를 빌림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1965년 -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의 합의에 의해 배틀 머모리얼 대학과 자매기관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6대 대통령으로 재선, 산림청 개청 1968년 - 1·21사태 한국군복장을 한 북한공비 31명 국내 잠입.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시도. 1968년 - 여운형 추모회 고문.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1970년 -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 수출 10억 달러 달성,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새마을 운동 제창 1971년 - 국고로 아르헨티나의 국토 중 일부 구매 후 농민을 엄선하여 파견함 1971년 -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 한국과학원 설립 1972년 - 7월 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관련 공동성명 발표 1972년 10월 17일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1차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91.5% 찬성표를 얻었으며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3년 8월 8일 -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 1975년 4월 9일 -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사법살인 자행 1975년 1월 22일 - 2차 유신헌법 찬반 재신임 투표에서 73.1% 찬성표를 받아 재신임을 받음 1976년 8월 - 칠백의총 주변 기념관, 주차장, 관리사무소 등 기타시설 건립 지시 1977년 -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수출 100억달러 달성, 부가가치세 시행 1977년 12월 -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 1978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 1978년 12월 27일 - 9대 대통령에 선출, 세계에서 7번째로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및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 성공 1979년 10월 - 남민전 관련자 검거, 크리스찬아카데미 관련자 검거 1979년 10월 26일 오후 8시경 -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을 받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 1979년 11월 3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학력]
 1932년 구미보통학교 졸업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1942년 신징 군관학교 2기 졸업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 졸업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졸업 1947년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1952년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1957년 육군대학 졸업 군 복무 

[경력]
 만주국 육군 소위 만주국 육군 중위 조선국방경비대 소위 조선국방경비대 대위 조선국방경비대 소령 1944년 12월 23일 1945년 7월 1일 1946년 12월 14일 1947년 9월 27일 1948년 8월 1일 대한민국 육군 중령 대한민국 육군 대령 대한민국 육군 준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 대한민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대장 1950년 9월 15일 1951년 4월 15일 1953년 11월 25일 1958년 3월 1일 1961년 8월 11일 1961년 11월 1일 기타 박정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김일성으로부터 증금강산 선녀도와 동봉된 김일성 친필 명함, 청자목문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 이 선물들은 2009년 1월 공개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가 박정희 기념 행사를 열어 논란을 일으켰다. 하순봉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2016년에는 우정사업본부가 2017년 9월 15일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60만장을 발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독재자를 미화하고 우상화한다는 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논란이 있기 때문에 기념우표 발행은 적절치 않다는 점,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 세칙》에서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의 경우에는 기념우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고 우정사업본부는 2017년 7월 12일에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를 통해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박정희는 집안의 강요에 의해 김호남과 결혼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혼했고 그 이후 육영수와 결혼했다. 이 당시 박정희의 슬하에는 14살의 딸 박재옥이 있었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이화여대생인 이현란과 약 3년간 동거하는 사실혼 관계였다.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는 사이에 둘 사이가 멀어졌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죽었다. 이현란은 바로 재혼하고 김호남 역시 재혼하였다. 그는 집권 당시 드라마에 강력한 규제를 내렸으며, 대체로 검열 대상이 된 것은 왜색이 짙은 것, 퇴폐적인 것, 저속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로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팝 음악과 미니스커트, 장발 문화, 일본 만화에 대해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단속이 이루어졌다. 1973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단속을 위한 법적 근거를 갖추었으며, 이는 1988년이 되어서야 개정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비고 제5대 대선 대통령 5대 민주공화당 46.6% 4,702,640표 1위 제6대 대선 대통령 6대 민주공화당 51.4% 5,688,666표 1위 제7대 대선 대통령 7대 민주공화당 53.2% 6,342,828표 1위 제8대 대선 대통령 8대 민주공화당 100% 2357표 1위 단독후보 제9대 대선 대통령 9대 민주공화당 100% 2377표 1위 단독후보 가족 관계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배우자: 김호남 장녀: 박재옥 사위: 한병기 배우자: 육영수 차녀: 박근혜 ,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3녀: 박근령 사위: 신동욱 장남: 박지만 자부: 서향희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문학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 이인화, 《인간의 길》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만화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드라마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1987년 - 《욕망의 문》, KBS2 " title="이진수 ">이진수) 1989년 - 《무풍지대》, KBS2 1989년 - 《제2공화국》, MBC " title="이진수 ">이진수) 1990년 - 《야망의 세월》, KBS " title="정욱 ">정욱) 1990년 - 《여명의 그날》, KBS 1993년 - 《제3공화국》, MBC, 김상민 - 소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홍경인 - 청소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창환 - 청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진수 - 장년 박정희 역 1995년 - 《전쟁과 사랑》, MBC, 이진수 1995년 - 《제4공화국》, MBC 1995년 - 《코리아게이트》, SBS 1998년 - 《삼김시대》, SBS 1998년 - 《야망의 전설》, KBS " title="정욱 ">정욱) 2003년 - 《야인시대》, SBS 2004년 - 《영웅시대》, MBC 2005년 - 《제5공화국》, MBC 2009년 -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 평화방송 드라마 2013년 - 《대한민국 정치비사》, MBN 2014년 - 《불꽃 속으로》, TV조선 영화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1995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균식) 2004년 - 효자동 이발사, 2005년 - 그때 그 사람들, 2006년 - 잘 살아보세, " title="이창환 ">이창환) 민족과 운명, ">김윤홍) 다큐멘터리 2013년 - 다큐극장, " title="이창환 ">이창환) 

[같이 보기]
 제3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제4공화국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 10·26 사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국토종합개발계획 국민교육헌장 그린 벨트 독도밀약 새마을 운동 대한민국 제2공화국 오노 반보쿠 오원철 육영수 허먼 칸 -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학 교사 윤보선 친일파 좌파 파시즘 차지철 최규하 전두환 민주공화당 정수장학회 여순반란 남로당 만주국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 김옥선 파동 부마민중항쟁 김학규 김성진 육인수 이석제 유원식 지미 카터 박종규 박동선 사건 제2차 세계대전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김정렴 유원식 윤치영 이한빈 박상희 한국 전쟁 박근혜 송요찬 장경순 린든 B. 존슨 존 F. 케네디 장제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윤필용 이승만 이후락 장도영 장준하 장면 조갑제 지만원 김재규 정구영 황태성 기시 노부스케 세지마 류조 고다마 요시오 마치이 히사유키 사사카와 료이치 미군 위안부 박근혜 관련 서적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조국 근대화의 지표》 《지도자의 길》 《한국 국민에게 고함》 《연설문집》 《수기집-나의 어린 시절》 

각주 ↑ http://www.pa.go.kr/school/president/former/index04.jsp ↑ 박정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정희 공원’ 논란 신당동 집 42년 전에 무슨 일이… 조선일보, 2013년 06월 17일 ↑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는 이유 한겨레, 2000년 11월 15일 ↑ 아시아·아프리카 20개국 70명 "한국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 ↑ "한국 산업 앞선 경험 배우러 왔죠" 왕양 中 광둥성 당 서기 방한 ↑ 오방색 걸친 상처입은 산하 "개발의 잔혹함 그리고 싶었다" ↑ "60년 최대 성과는 산업화" 56% 경향신문 2008. 8 ↑ 박정희 바로 세우기 세계일보, 2009년 10월 16일 ↑ 역대 최고 대통령에 박정희 압도적 1위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아시아경제, 2008년 8월 14일 ↑ 김재중 기자 . “"성장·개발 향수 떨쳐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경향신문.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정운현 기자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월남전 파병은 정당했다 세계일보 2006-06-29 ↑ 가 나 김정곤 기자 . “파병 논란 아직도 현재진행형”. 한국일보.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김헌식 기자 . “'아이리스'에 비친 한국인의 핵무기 열망”. 데일리안.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역대 대통령 국가발전기여도 노무현 1위…박정희 2위 · 김대중 3위”. 《news.donga.com》. 2016년 12월 23일. ↑ “ 文대통령, 전·현직 대통령 호감도 1위…박정희 2위”. 《중앙일보》. 2018년 4월 3일. ↑ 가 나 " - 조선닷컴 인물 ↑ 가 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 박근혜, 조부의 동학행적으로 부친의 과거사 굴레 벗나? ↑ 가 나 다 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353~354쪽 

[참조]
. ↑ 가 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2007년 9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5년 10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1998.01.06일자 ↑ 가 나 다 “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홈페이지 ”. 2015년 9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18일에 확인함. ↑ 가 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1998.01.22 ↑ 청년 박정희 ↑ 가 나 다 "박정희, 독립군 토벌" 출판업자 무죄 확정 한겨레 2009년 02월 08일자 ↑ 가 나 다 ."박정희, 독립군 토벌" 책 출판 무죄 확정 Archived 2011년 8월 8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9년 02월 09일자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 121쪽 

[참조]
 ↑ '독립군 토벌한 박정희' 역사서 명예훼손 무죄 경향신문 2009년 02월 08일자 ↑ 박정희가 정말 독립군을 토벌했는가《데일리안》 ↑ "박정희, 독립군 토벌" 출판업자 무죄 확정《한겨레》 ↑ 国立国会図書館 NDL-OPAC ↑ 이경원 기자 . “"만주국 위해 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 신문 공개”. 국민일보. 2009년 11월 6일에 확인함. ↑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ハンギョレ. 2009년 11월 5일. 2010년 12월 17일에 확인함. ↑ “보관 된 사본”. 2010년 1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9일에 확인함.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 “보관 된 사본”. 2012년 4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1월 22일에 확인함. ↑ 청년 박정희 , 박정희대통령 인터넷 기념관 ↑ 친일 조사대상서 박정희 뺄 수도 있다, 《오마이뉴스》, 2004.07.22. ↑ 김하영 기자 .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프레시안.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5616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일본군 병적기록 60년 만에 '햇빛' - 오마이뉴스 2005-02-02]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125페이지 ↑ 가 나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66-67페이지 ↑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 P.121 ↑ http://100.naver.com/100.nhn?docid=865542 ↑ 인구·경제력·자치권 동시 위축: : 네이버 뉴스 ↑ 인쇄하기: 한겨레21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6&levelId=tg_004_2760&ganada=&pageUnit=10 ↑ "가상토론 박정희 조갑제 진중권 만나다" 동아일보 2006년 12월 6일자 ↑ 김명호 교수 . ““중공 승리해야 조선 해방” 조선인에게 투항이란 없었다”. 《한겨레》.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 네이버 뉴스 ↑ 가 나 다 대통령과 '창씨개명', 《오마이뉴스》, 2002.9.2. ↑ 가 나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왜 두개였나, 《세계일보》, 2006.08.09 ↑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 '박정희 재조명' 날선공방 불붙는다 한겨레, 2004.07.26 ↑ 가 나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인가, 조선일보, 2014.09.15 ↑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 오마이뉴스, 2012.12.06 ↑ 가 나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 오마이뉴스, 2012.12.06 ↑ 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 조희연 저서 참고 ↑ 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

[참조]
. ↑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35페이지 ↑ 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③ ↑ 5·16 때 박정희 사상 의심했다? ↑ 日軍내 韓人 투쟁지침 알리는 전단 첫 공개: : 네이버 뉴스 ↑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 장교의 군번은 성적순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시종일관 동일하며 외국의 군대 역시 장교는 성적순으로 군번이 결정된다. ↑ 가 나 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80664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 아들 낳았다" ↑ 박태균, "한국전쟁" , pp.149-150, 2005.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가 나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 가 나 다 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조선닷컴 인물 ↑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 -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가 나 다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 - - 조선닷컴 인물 ↑ 가 나 다 라 마 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권 - 도서관 프로필 ↑ 가 나 다 라 마 바 정운현 .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 누가 살려줬나”.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 2》 114페이지 ↑ http://news.donga.com/3/all/20101118/32678104/1 ↑ 가 나 다 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 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 295페이지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 ↑ 가 나 다 라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 가 나 박정희, "국회에 불을 확 질러버리고싶었다" - 조갑제 닷컴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145페이지 ↑ “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02월호 ↑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 국가정보원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결과 ↑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68945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21046 ↑ ↑ ↑ ↑ ↑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정부의 선택』, 후마니타스, 2009.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178페이지 ↑ 가 나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179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183페이지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224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221페이지 ↑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224페이지 ↑ 가 나 다 이병주, 《그해 5월 3》 122페이지 ↑ 가 나 경향신문 1963년 09월 28일자 정치, 1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 ↑ 가 나 동아일보 1963년 10월 2일자 정치, 1면 ↑ 가 나 다 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 가 나 발굴-현대사 뒷모습 ↑ 여순사건 박정희씨 무관 경향신문 1963년 10월 4일 ↑ 가 나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munhwa.com ↑ 박정희 - Daum 백과사전 ↑ 김진주 기자 . “지역주의와 인종주의”. 프로메테우스.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이기형 《여운형 평전 》 464페이지 ↑ 박정희와 KIST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가 나 다 라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 조갑제 ↑ 가 나 다 라 마 박정희-존슨 회담과 월남파병 - 조갑제 ↑ 미, 65년 '독도 한·일 공동소유' 제안: : 네이버 뉴스 ↑ 42년 전 한일 독도밀약의 실체는....: : 중앙일보 뉴스 ↑ 美 “독도 한일 공동소유하라", 박정희 "있을 수 없는 일": : 네이버 뉴스 ↑ “한일문서로 밝혀진 박정희 정권 비화 ‘전모’”. 2011년 1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15일에 확인함.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 "한일협정 뒷거래 박 정권은 매국정권 5년간 일본기업에 6600만불 제공받아" ↑ ‘독도문제’, 밀약파기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 ↑ 가 나 다 라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 가 나 다 라 마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92페이지 ↑ “HOME > 인간박정희 > 박정희 대통령 > 

[경력]
”. 2013년 12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0월 10일에 확인함.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김충식,『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 296쪽. ↑ "박정희정부, 유신선포전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 ↑ 가 나 다 라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82쪽 

[참조]
. ↑ 가 나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82~83쪽 

[참조]
 ↑ 황경상 기자. “박정희 성공한 정책, 알고보니 메이지 유신,군국주의 파시즘을 조국근대화로 포장…치욕”. 《경향신문》.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최일붕 기자 .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노동자연대》.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김호천 기자 . “세계무형유산 '영등굿' 기능보유자 김윤수씨”. 《연합뉴스》.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김하영 기자 . “'제2 새마을운동'? 석면 지붕부터 책임져야”. 《프레시안》.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6001012 ↑ “보관 된 사본”. 2013년 1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2월 26일에 확인함. ↑ 김정렴이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언급. 이고운 기자 . “박정희의 경제정책 18년, 생생한 증언”. 209년 5월 12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 “원로가수 남상규,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시로 노래 만들어”. 2005년 1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2월 20일에 확인함.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외교안보> 미국이 박정희 피살의 배후?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방송분 ↑ donga.com - <34>20일의 휴직] ↑ 세정신문-한국대표 조세정론지 ↑ “복지한국연대 > 자료와 토론 > 세금 이야기- 박정희 정부와 부가가치세 논쟁”. 2013년 11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0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박정희를 넘어서 130페이지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179-180쪽 ↑ 단상의 외교사절 보면 커가는 한국 보인다- 중앙일보 뉴스 ↑ 윤태곤 기자 . “야당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배워야 할 것”. 《프레시안》. 2015년 3월 30일에 확인함.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조선닷컴 인물 ↑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중앙일보 뉴스 ↑ 전기 《박정희》,조갑제 著 ↑ "박정희 前대통령 말년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 "박정희 대통령,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북조선 악마의 조국》 253~254 페이지 ↑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 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 114페이지 ↑ 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 133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229페이지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268페이지 ↑ 가 나 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3》 222페이지 ↑ 가 나 이상우,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102페이지 ↑ 가 나 「www.한국현대사.com」 229페이지 ↑ 가 나 「www.한국현대사.com」 230페이지 ↑ 한국은행, <<주간 내외경제>> 864호, 1978, pp1~5 ↑ 이상 내용 2004년 4월 11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및 장상환, 「해방 후 한국자본주의 발전과 부동산 투기」, <<역사비평>> 2004년 봄호, 2004 

[참조]
 ↑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 국사편찬위원회 국민공통과정 국사교과서 p.153 ↑ 가 나 다 김달중, 《한국의 외교정책》 58페이지 ↑ 가 나 다 "실록 박정희시대, 자위에서 자주로 ↑ 중앙일보 기사, "실록 박정희시대" 1997년 10월 26일, 29일, 11월 2일, 11월 5일자 

[참조]
. ↑ 하영선, 『한반도의 핵무기와 세계질서』 ↑ Peter Hayes,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uclear Issue ↑ 가 나 다 피터 헤이즈, 『韓國の核兵器開發』, 世界, 1992, 12. ↑ 노재현, 《청와대 비서실 2》 p.68 ↑ 가 나 다 라 김교식, 《다큐멘타리 박정희》 p. 223 ↑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초 부터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 가 나 다 라 박정희를 넘어서 131페이지 ↑ 차상철, 《한미동맹 50년》 34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한미동맹 50년 34페이지 ↑ 노재현, 《청와대 비서실 2》 p. 87 ↑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 가 나 "책갈피 속의 오늘" 1965년 전투병 베트남 파병 의결 ↑ 김수행,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역대 대통령과 종교 ↑ 가 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1998년 01월 07일자 ↑ 불국사-석굴암,1만원권 지폐모델 계획 있었다, 불교 포커스 ↑ 1만원권 원래 도안은 석굴암, 한겨레 경제 ↑ 1만원권 지폐 변천사, JOINS 뉴스 ↑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개발독재, 필연인가 선택인가 ↑ 토드 벅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승환옮김 15쪽 아시아의 붕괴. ↑ “한·일회담서 과거사청산 못한 건 반공논리 탓” ↑ ‘녹색성장 원동력,그린벨트 벽 허물기 Archived 2013년 12월 13일 - 웨이백 머신그린벨트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112~113쪽. ↑ PD저널 ↑ http://mbn.mk.co.kr/news/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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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읽기2019. 8. 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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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나경원:: 나경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 "wgVisualEditor": "ready" 나경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나경원 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63년 12월 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본관 나주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제법학 박사 수료직업 법조인경력 부산지방법원 판사인천지방법원 판사서울행정법원 판사한나라당 장애인복지특별위원회 위원장한나라당 최고위원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교수숙명여자대학교 석좌교수새누리당 서울시당 위원장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 배우자 김재호자녀 김현조 김유나종교 천주교 소속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원 선수 4의원 대수 17·18·19·20정당 자유한국당지역구 서울 동작구 을당내 직책 원내대표국회 직책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웹사이트 

 나경원은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4선 국회의원이며, 자유한국당 최초의 여성 원내대표이다. 

목차 1 

[학력]
 2 

[생애]
 2.1 판사 활동 2.2 정계 입문 2.3 변호사 활동 2.4 정계 복귀 2.4.1 제17대 국회의원 2.4.2 제18대 국회의원 2.4.3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낙선 2.4.4 제19대 국회의원 2.4.4.1 스페셜올림픽 활동 2.4.4.2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활동 2.4.5 제20대 국회의원 3 경력 4 견해 4.1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4.2 경제적 입장 5 사건 5.1 나경원 딸 성신여대 부정입학 의혹 5.2 자위대 행사 참석 5.3 BBK 관련 발언 5.4 여교사 관련 발언 5.5 천안함 구조대원 빈소 촬영 5.6 장애인 목욕 봉사 노출 5.7 대통령 사저 관련 발언 5.8 SNS 셀프 지지 5.9 사학재단 관련 5.10 박사모 회장의 '관기' 발언 관련 고소 5.11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5.12 재산 신고 허위 기재 의혹 5.13 평창올림픽 조직위원 파면 청원 논란 5.14 나경원 비서 막말 논란 5.15 고성 산불 정의용 안보실장 이석 지연 사건 5.16 `문빠·달창` 발언 논란 6 역대 선거 결과 7 

각주 8 

 

[학력]
 1970년 계성초등학교 입학 1976년 계성초등학교 졸업 1979년 숭의여자중학교 졸업 1982년 서울여자고등학교 졸업 1982년 서울대학교 입학 1986년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제법학 박사 수료 

[생애]
 1963년 12월 6일 홍신학원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나채성의 4녀 중 장녀로 서울 동작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본관은 나주이며, 할아버지는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출신이다. 계성초등학교 시절 아동극 연출 지도 교사로 온 배우 서인석에게 오디션을 통해 발탁되어 연극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여자고등학교 시절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체 557명 중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3년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30세가 되던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같은 학교 동기인 김재호와 결혼하였고, 1남 1녀를 두었으며, 딸은 다운증후군이 있다. 판사 활동 사법연수원 24기로 수료하고 1995년 부산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 이후, 1999년 인천지방법원, 2002년 2월 서울행정법원까지 총 7년 6개월간 판사로 재직하였다. 

 

정계 입문 

2002년, 제16대 대선 기간, 이회창의 요청에 따라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판사가 판사를 그만두고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추미애 이후 두 번째다. 나경원은 ‘소신 판결을 해온 이회창 후보를 법관시절부터 존경해 왔다’고 밝혔다. 

 

변호사 활동 

2003년 3월 이회창이 대선에 패배하자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7월 법무법인 바른에서 실제 변호사 업무를 하진 않았지만, 주요 구성원이었다. 

 

정계 복귀 

‘정치인 나경원’은 2003년 7월 10일 한나라당 운영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정치계에 등장했다. 이후 한나라당에서 활동하며 12월 29일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004년 3월 30일, 비례대표 11번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교수출신 당선자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정책을 공부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당선자 연찬회에서는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였다. 5월 12일에는 중도개혁보수를 지향하는 초재선의원의 모임인 ‘푸른정책연구모임’의 발족과 동시에 참여하였다. 당초 문화관광위원회에 지원 했지만 정무위에 배정되었다. 나경원 의원은 딸이 다운증후군을 앓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경험을 살려 국회의원과 장애아동 부모 및 전문가 등이 의견을 나누는 연구모임 '장애 아이, We Can'을 만들어 회장을 맡기도 했고, 한나라당 장애인복지특위 위원장을 역임하며, 장애인 처우 개선을 포함한 복지·인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 의원은 17,18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성년이 된 장애인이 부모가 없더라도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관리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장애성년 후견법안’ 1건과 각기 다른 내용의‘특수교육진흥법 일부개정안’4건을 대표발의해, 5건 모두 대체입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외에도 10건의 장애인 관련 및 특수교육 관련 법안을 공동발의한 바 있다. 제17대 국회의원 2004년 국정감사에서 나경원은 금융감독위원회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승인을 적극 검토하려 했다는 금감위 내부 문건과 증권선물위원회의 자문기구인 감리위원회의 민간 위원 대다수가 국민은행 김정태 전 행장의 중징계에 반대했었다는 의사록을 공개했다. 또 국정감사 기간 중 당시 여당이 제기한, 이명박이 시장이었던 서울시가 수도이전집회를 위한 관제데모를 위해 5억원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허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후 국감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국내 금융산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정책자료집을 발간했으며, 행정부 산하 자문위원회들의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자문위원회 기본법' 제정안을 제출했다. 2004년 국정감사 기간 뒤 2005년 1월 20일 원내부대표로 임명되며 이어 2월에는 당 윤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후 나경원은 한나라당의 공보부 대표로 활동하며, 한나라당의 사학법 통과에 반발하거나 검찰의 X파일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었다는 당의 입장을 발표 하기도 했다. 또 나경원은 출자총액제한제 법안 폐지를 골자로 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 후 나경원은 오세훈 후보 서울시장 캠프에 합류하였고, 이 후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전여옥에 이어 나경원을 유기준과 함께 한나라당 공동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나경원은 당대변인으로서 일하며 김병준 교육부총리 논문 이중보고를 비난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조카의 바다이야기 판매회사 근무와 관련한 의혹제기를 했다. 또 전효숙 헌법재판관의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과 관련해 절차와 인물을 들어 반대한다는 당의 입장을 전하기도 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관련된 언급과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입만 열면 설화를 일으키는 개구즉화"라는 당을 대변하는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2008년 3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1년 8개월 동안 맡아왔던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어 서울특별시 중구에 공천을 받아 앵커 출신 신은경과 대결을 펼쳐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18대 국회의원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나경원은 한나라당의 제6정조위원장을 맡았다. 또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의원을 맡기도 했다. 나경원은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차를 불심검문한 것과 관련, 2008년 9월 4일 공직자의 종교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 및 지방공무원법을 제출했다. 또 어청수가 사퇴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경원은 2008년 8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장, 이동관 대변인과 함께 국정원 2차장과 회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11월 3일 나경원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다, 이 개정안은 공공연하게 사람을 모욕하는 정보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 등에게 취급거부, 정지, 제한명령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람을 모욕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이 법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사이버 모욕 행위는 명시적 기준이 없어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2009년 새해부터 미디어 관련 22개법을 놓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첨예한 대립을 앞두고 있을 때, 이 법안을 담당하는 국회 문방위의 한나라당측 간사였던 나경원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나경원은 1월 22일 "미디어 관련법은 1월 여야 합의정신과 국회법에 따라 처리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나 결국 문방위의 위원장이었던 한나라당 고흥길은 2월 25일 기습상정으로 이 법안들을 통과시킨다. 이 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협상과정에서, 나경원은 안상수 원내대표가 제안한 민주당의 시행 유보안에 대해서도 "대기업과 신문사도 지상파에 진입시키는 것이 원칙"이라며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한나라당 경선에 도전하였으나 오세훈후보에 패배하고, 대신 오세훈 선대위원장으로 합류하여 지방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낙선 34대 서울특별시장 오세훈이 2011년 8월 24일 실시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된 것에 따른 책임을 지고 8월 26일 시장직을 사퇴함에 따라 치러진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011년 10월 26일 개표 결과 박원순 후보가 약 215만여 표를 얻어 53.4%의 득표율을 나타냈고,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가 약 186만여 표를 얻어 46.2%의 득표율을 나타내어 낙선했다. 이후 나경원은 여의도 당사 기자회견을 통해 "어차피 당이 공천 안 했을 것"이라며 인터뷰를 남기고 4.11 총선에 불출마했다. 제19대 국회의원 2014년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 정몽준 의원의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공석이 된 서울 동작구 을 지역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야권단일후보로 나선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를 꺾고 당선되었다. 

 

7.30 재보궐선거에 당선됨에 따라 나경원은 새누리당 내 유일한 여성 3선의원이 되었고, 상임위는 외교통일위원회를 배정받았다. 이후 2015년 2월 26일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유기준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에 내정됨에 공석이 된 외교통일위원장을 정두언 의원과 경선을 벌여 135표 중에 92표를 얻어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이는 헌정사상 외교통일분야 상임위에 여성 의원이 처음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셜올림픽 활동 나경원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2008년부터 스페셜올림픽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스페셜올림픽의 유치와 준비를 위해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들과 인맥을 모두 활용하는 한편, 정부 관계자와 의원들을 설득해 대회 유치를 결의했다. 2010년 9월 15일, 대회의 평창 유치를 발표할 때에는 전설적인 체조스타이자 스페셜올림픽 이사회 부의장인 나디아 코마네치의 선언문 발표에 이어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성화를 전달받았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평창 스페셜올림픽 참석의 뜻을 밝혔다. 대회를 100일 앞둔 2012년 10월 21일에는 걷기대회와 전광판 제막 행사를 여는 등 스페셜올림픽의 성공과 홍보를 위해 노력했다. 걷기대회는 강원도 대관령 일대와 청계천에서 진행됐으며, 특히 ‘청계천 걷기대회’는 ‘피겨여왕’ 김연아를 비롯해 ‘마라톤영웅’ 황영조, 양준혁 SBS 해설위원, 심권호 LH스포츠단 레슬링 코치 등 스포츠 스타와 남경주 뮤지컬 배우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회에 앞서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단이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해서 국내 적응을 돕고자 ‘호스트 타운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했고, 지적장애인과 비장애인 스타들이 함께하는 통합스포츠 프로그램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시행하였다. 더하여 스페셜 올림픽 개최 사상 처음으로 지적장애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제 정상회담인 ‘글로벌 개발 서밋’과 ‘세계 청소년 회담’ 등의 국제회의도 열었으며, 특히 개발 서밋에서는 세계 지적 장애인들의 권익 보호와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하는 ‘평창선언’을 채택했다. 이러한 노력에 이어 ‘Together We Can’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평창 스페셜 올림픽은 전 세계 106개국 3,000 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흥행 면에서도 7일 동안 진행된 8개 종목의 경기에 하루 평균 3만명, 총 2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 동원을 기록했다.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 전략기획수석 피터 월러는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일컬어 “모든 부문에서 역대 최고의 대회로 기획, 조정, 무대 준비, 홍보가 모범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대회 이전 0%에 가까웠던 지적장애인과 스페셜올림픽에 대한 인지도가 71%까지 상승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의 성공은 지적장애인 선수들과 비장애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행사라는 평가와 함께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초석을 다진 대회로 평가됐다. 한편 나경원은 SOK의 회장으로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걸으며 서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투게더 위 워크’ 행사를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2014년 10월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슈퍼블루' 캠페인의 선포식을 갖고, 이어 2014년 12월에는 소외된 계층인 장애인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 홍보를 위한 ‘2014년 슈퍼블루 캠페인 가두홍보’ 행사를 명동입구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2015년 10월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달리는 슈퍼블루 마라톤 대회를 열었고, 이를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서로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때까지 매년 개최할 예정이다. 스페셜올림픽 기간 동안 매일 진행된 발달장애인 음악회가 효시가 된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을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레거시 사업으로 추진, 온전히 발달장애 아티스트를 위한 페스티벌로는 전 세계 유일한 국제발달장애예술축제로서 매년 그 명맥을 이어가며 2015년까지 꾸준하게 3회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5년 7월에는 SOK의 회장이자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의 이사로서 한국 선수단을 이끌고 2015 LA 스페셜올림픽에 참가해 12개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35개 은메달21개 동메달 25개로 총 81개의 메달을 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활동 2015년 2월,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에 선출됐다. 국회 외통위원장에 여성 의원이 선출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국회는 26일 본회의에서 보궐선거를 진행해 208표 중 176표를 얻은 나경원 의원을 새로운 국회 외통위원장에 선출했다고 밝혔다. 나 의원은 당선 인사에서 "우리 외교가 녹록치 않다. 정부와 국회가 소통과 협업을 통해 여러 가지 산적한 현안들을 풀어가겠다"면서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서 통일의 초석을 놓는데 국회가 앞장서도록 노력하겠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서 10년간 미뤄온 북한인권법도 반드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나 의원은 앞서 이날 오전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진행된 외통위원장 후보 경선에서 총 135표 가운데 92표를 얻어 43표 득표에 그친 정두언 의원을 누르고 후보 자리를 거머줬다. 그가 취임하던 2015년에는 리퍼트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을 포함해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교과서 도발, 일본 근대산업시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주한미군 탄저균 배달사고, 프랑스 파리 테러 등 유난히 외교 분야에서 국가적 난제들이 돌출된 해였다. 나경원은 정치 활동 초기부터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한 활동을 이어왔다. 초선 의원이었던 17대 국회에서 이미 ‘ 북한인권 결의안’을 최초로 제출했다. 북한인권문제의 국제적 이슈화는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유엔 북한인권사무소’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나경원은 2015년6월23일‘유엔 북한인권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하는 한편, 자이드 라아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최고대표와 만나 북한인권 증진 및 보호에 더욱 힘써줄 것을 당부하고 향후 공조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한편 19대 국회에서도 여전히 협의점을 찾지 못해 10년째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의 통과를 위해 꾸준히 야당의 합의를 촉구하고 있다.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의 피습사건과 관련해서는 미국 의회에 서한을 보내 유감과 위로의 뜻을 표하고 한미동맹 강화를 당부하였다. 또한 외교통일위원장으로서 11월 30일 외통위 전체회의를 열어 한중 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안 등을 처리하였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로, 한-중 각국 정상 협상 타결 후 1년 만에, 정식 서명한지 6개월 만에 한중 FTA 비준동의안 통과라는 성과를 내었다. 또한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동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나경원은 명확하게 반대의견을 고수했다. 나경원은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강제 징용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규탄 결의안'을 의결하는 한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 의회를 대상으로 서한을 발송, 등재 저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국회 차원의 협조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왔다. 이후 유네스코 사무총장인 이리나 보코바를 만나 우려를 전달하거나 외통위원회 소속 위원들을 중심으로 대표단을 구성, 위원국들을 방문하는 방문외교를 통해 꾸준히 등재 반대를 위한 노력을 펼쳤다. 또한 외통위원장으로서 멕시코를 방문하여, 양국 간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노력하는 등 다양하고 즉각적인 외교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북한 인권 문제나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동시에 통일 외교의 중요성과 북한의 동시 발전을 강조하는 투 트랙 외교를 보여주고 있다. 2016년 1월6일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제4차 핵실험 규탄 및 핵폐기 촉구 결의안'을 제안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 통과된 규탄 결의안에서 "북한이 우리나라와 국제 사회의 거듭된 우려와 경고를 무시하고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이러한 도발행위 및 핵보유 시도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넘어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미·러 주한대사들과 만나 북핵 제재 UN 안보리 결의를 요청하고, EU연합 회원국 대사들을 국회로 초청, 北제재 결의안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등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어 미국의 핵심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 및 헤리티지재단 관계자들과 면담을 갖고, 북핵문제 대응을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한편 통일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할 때는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북한 방문을 제안하면서 북한의 문화유적 발굴 사업에 대한 유네스코 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당부하기도 했다. 또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를 만나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위해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대북 기술원조’ 및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북한초청’ 등의 경제협력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남북 문화교류의 하나로 개성 만월대를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에 찬성 결의하였다. 2018년 12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103표 중 68표를 얻어서 35표를 얻은 김학용 의원을 제치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선거제 개혁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안 등의 패스트트랙 지정에서 자유한국당의 선진화법 위반논란과 이어진 국회공전, 국회 정상화에 대한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안의 의원총회 추인 실패등 원내대표로서의 정치적 협상력과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있다. 경력 1995.03 ~ 1999.02 부산지방법원 판사 1999.03 ~ 2002.02 인천지방법원 판사 2002.02 ~ 2002.09 서울행정법원 판사 2002.09 ~ 2002.12 제16대 대선 이회창 후보 여성특별보좌관 2002.10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2003.12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2004.05 ~ 2008.05 제17대 국회의원 2004.07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2004.07 ~ 2005.11 한나라당 장애인복지특별위원회 위원장 2005.01 ~ 2006.01 한나라당 원내부대표 2004.07 장애아이 위캔 회장 2006.06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2006.07 ~ 2008.03 한나라당 대변인 2007.10 제17대 대선 이명박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2007 ~ 한국장애인부모회후원회 공동대표 2008.05 ~ 2011.09 제18대 국회의원 2008.06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간사 2008.06 ~ 2009.05 한나라당 제6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 2008.07 ~ 2016.09 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2009.05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 2009.05 ~ 2011.04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명예회장 2010.07 한나라당 최고위원 2010.07 한나라당 공천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2010.07 ~ 2013.12 사랑나눔위캔 회장 2010.11 ~ 2013.06 2013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2011.02 ~ 스페셜올림픽국제본부 SOI 이사 2011.05 ~ 2016.07 제2대 스페셜올림픽코리아 SOK 회장 2011.07 ~ 2012.01 한나라당 최고위원 2011.08 ~ 2011.09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홍보대사 2011.09 제48회 대종상영화제 공동명예조직위원장 2011.10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한나라당 후보 2013.03 ~ 2014.03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2013.11 ~ 2017.09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 집행위원 2014.05 ~ 2014.07 숙명여자대학교 석좌교수 2014.07 ~ 2016.05 제19대 국회의원 2014.08 ~ 2015.02 제19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2014.08 제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4.09 국회 한일의원연맹 여성위원장 2015.02 ~ 2016.05 제19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2015.05 제19차 한미일 의원 회의 한국대표단 2014.09 ~ 2015.06 새누리당 서울시당 위원장 2014.09 ~ 2015.04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15.03 ~ 2015.06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2015.04 ~ 한국여성의정 공동대표 2015.12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고위급 세션 한국 대표 2016.05 ~ 제20대 국회의원 2016.06 ~ 2018.06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2016.07 ~ 2017.06 제20대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2017.03 ~ 국회 한·네덜란드 의원친선협회 회장 2017.03 ~ 국회 한·미 의원외교협의회 부회장 2016.07 ~ 국회생명존중포럼 대표의원 2016.07 ~ 미래인사포럼 대표의원 2017.01 ~ 2017.12 제20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 2017.12 ~ 2018.05 제20대 국회 미세먼지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18.01 ~ 2018.06 제20대 국회 헌법개정 및 정책개혁 특별위원회 위원 2018.07 ~ 제20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8.12 ~ 제20대 국회 후반기 운영위원회 위원 2018.12 ~ 제20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위원 2016.06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2016.07 UIA 2017 서울세계건축대회 명예위원 2016.09 ~ 2016.11 새누리당 인재영입위원장 2016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대회장 2017.10 ~ 2018.03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및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2018.05 ~ 2018.06 : 제7회 지방선거 자유한국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2018.12 ~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2018.12 ~ 2019.02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 2019.02 ~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견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했으며, 개정에 동의했다. 경제적 입장 2004년 출자총액제한 제도 및 계좌추적권 도입, 대기업 계열 금융·보험사 의결권 축소 등에 반대했었다. 2004년에는 보험자회사를 둔 은행만 살찌는 등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는 이유로 방카슈랑스 2단계 도입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 2004년 국정감사에서 통신 시장에 대한 규제가 자율경쟁을 해치고 소비자의 편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나경원은 11월 18일에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국회처리 관련 판결 뒤, 11월 19일의 MBC 100분 토론에 나와 헌법 재판소가 미디어법이 유효하다고 판결했다는 주장을 했으나, 다른 패널이 "헌재 사무처장이 미디어법이 유효하다고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나경원은 사무처장의 말이 헌재를 대표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렸으므로 미디어법은 유효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밝혔다. 사건 나경원 딸 성신여대 부정입학 의혹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2016년3월17일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의 딸인 김아무개씨가 2012학년도 성신여대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했지만, 학교 측이 이를 묵인하고 특혜를 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며 부정 입학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나경원은 이를 보도한 뉴스타파 황모 기자를 고소했고 재판에 넘겨진 황모 기자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서정현 판사는 8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황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다소 과장되거나 평가로 볼 여지가 상당하지만 허위 사실을 적을 것이라 볼 수 없다"며 "보도 내용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써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자위대 행사 참석 2004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위대 창립 50돌 행사를 열였을 때 나경원이 행사에 참석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나경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가 국회의원 되자마자였는데 일본 대사관에서 하는 행사라서 가야된다고 해서 갔는데 가서 보니까 자위대 창립 행사라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 대사관의 방명록 이런 것을 보시면 제가 참석 안 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라고 밝히었다. 이후 나경원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하여 "자위대 행사에 참석했다는 비난의 글이 많다. 정황은 이렇다", "초선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 행사 내용을 모른 채 갔다 현장에서 뒤늦게 알고 되돌아 왔다", "처음 이 문제가 제기됐을 때 답변한 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변명처럼 보일까 우려되기도 했고, 행사 내용을 미처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도 있었기 때문", "오늘 트위터에 속 시원하게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 글을 드린다"라고 밝히었다. 하지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는 “서울의 중심에서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를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참석한다는 게 말도 안 돼 국회의원실에 직접 공문을 보냈다”며 나경원이 무슨 행사인지 모르고 갔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해명이라고 반박하였다. 윤 대표는 지난 해 나 의원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50만 국민 서명’에 함께 했다고 알리기도 했다. 윤 대표는 “초선 의원 때에 비해 지금은 위안부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BBK 관련 발언 2007년 나경원은 한나라당 대변인 시절, BBK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 설립했다"라고 말한 동영상이 공개된 데 대해 "다소 과장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 있었을 뿐 ‘내가 설립했다’고 하지 않았으니 설립한 거라고 보기 힘들다. 이것을 이명박 후보가 설립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다"라는 발언을 하여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서 일부 언론과 대통합민주신당이 당시 발언의 앞부분만 떼어내서 해석을 해서 오해를 빚었다고 해명했다. 여교사 관련 발언 2008년 11월 11일 나경원 의원은 경남 진주시에서 열린 경남 여성지도자협의회 정기총회에서 "1등 신붓감은 예쁜 여자 선생님, 2등은 못생긴 여자 선생님, 3등은 이혼한 여자 선생님, 4등은 애 딸린 여자 선생님"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 말에 야당과 여성 단체, 전국교원노동조합 등이 반발했다. 이에 나경원 의원은 “교원평가제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교사에 대한 처우가 좋고, 우수한 이들이 교사가 된다는 말을 하다가 시중의 우스개 얘기를 전했을 뿐”이라며 “여교사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천안함 구조대원 빈소 촬영 나경원 의원은 2010년 4월 천안함 침몰 사고 당시 수색작업 중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의 빈소를 찾았고, 보좌진이 이 모습을 사진에 담아 나 의원의 미니홈피에 올린 것이 논란이 됐다. 그러나 당시 한 준위 빈소 조문에는 나 의원 이외에도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와 김진표 의원, 국민참여당의 이재정 대표와 유시민 전 의원 등이 참여했고, 이들 역시 자신들의 활동을 각자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이후 나경원 의원은 당시 논란에 대해 "빈소에 여야 의원이 많이 갔고, 다들 ‘조문하는’ 사진을 찍었다. 그걸 미니홈피에 올리는 것은 지역구민들에게 내가 오늘 이런 일을 했다는 일종의 활동 사진이기 때문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장애인 목욕 봉사 노출 2011년 9월 27일 나경원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소재한 한 중증장애인시설을 찾아 빨래·목욕·식사보조 등 봉사활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12세 장애아동의 알몸 목욕장면이 노출됐고, 이를 취재진이 촬영해 논란이 됐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나 의원이 이런 연출된 상황을 직접 지시했을리는 없겠지만 현장에서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바로잡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했어야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나경원측은 "목욕봉사를 들어갈 때에는 취재진에게 들어오지 말아달라고 협조 요청을 했는데 카메라들이 통제가 안된 상황에서 들어왔다", "우리가 먼저 목욕 봉사 장면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또한 욕실에 있었던 반사판 등 전문 촬영 장비도 나 의원 측이 설치한 게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가브리엘의 집 관계자는 "평소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는 전문 사진가가 이날 촬영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경원 의원은 2011년 9월 28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제 삶에 있어 특히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 저만큼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논란이 벌어져 안타깝다", "더 설명을 드리고 싶어도 또 다른 얘기들을 하실까봐 말을 아끼고 있다"고 말하며, "저는 해당 시설에 가서 1시간 반 이상 봉사활동을 하고 온 것이니 그 부분을 헤아려달라"라고 덧붙였다. 대통령 사저 관련 발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와 관련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는 2011년 10월 17일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문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 사저 문제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이나 모두 비판할 만한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나 후보는 " 같은 시각으로 내곡동 사저에 대해서도 국민 정서와 안맞고 눈높이를 맞춰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SNS 셀프 지지 2011년 10월 15일,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자신의 트위터에서 스스로를 지지하는 ‘자화자찬’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신이 작성한 글을 리트윗해 “콘텐츠가 있는 공약과 정책 정말 멋집니다” 등 자신을 지지하는 댓글을 달았다. 이에 네티즌들이 ‘나르시즘 나경원’ ‘자화자찬도 유분수’ ‘알바의 실수인가’ 등의 지적을 하자 나경원 측은 2011년 10월 16일 해당 트위터 글을 삭제하고 “확인 결과 시스템 간에 충돌이 일어나 계정 연동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현재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1년 10월 20일 한 트위터 사용자가 나경원 트위터 멘션 오류에 대해 트위터 본사에 문의한 내용을 온라인에 게시했는데 트위터 본사 답변에 따르면 “나 후보 측의 트위터 글은 트위터 내부 오류나 장애가 아니다”라며 “후보자는 트윗을 포스팅 하기 위해 외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이어 “이같은 오류나 장애는 트위터가 아닌 이 어플리케이션에서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며 트위터 계정 연동 오류가 아니라고 밝혀 '계정 연동 시스템 오류'라던 나경원의 해명이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학재단 관련 MBC 방송에서 라디오 인터뷰 도중에 홍신학원과 관련된 질문을 받자, 나경원은 "아버지의 학교고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홍신학원은 아버지 학교임과 동시에 나경원 후보가 2001년부터 현재까지 이 학교의 이사로 있었다. 정봉주 전 의원은 “나경원 후보가 심각한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아버지 학교니까 나한테 얘기하지 마라, 이건 말이 안 맞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봉주 전 의원은“나경원 후보가 ‘그 학교는 감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라며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화곡중·고, 화곡여상을 지칭했는데, 화곡중·고등학교는 이미 우리보다 앞선 16대 국회 때 국회에서 감사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한 50일 동안 시간을 끌다가 결국 그 학교만 유일하게 감사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왜 제출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행정실장이 감사 자료를 불태워버렸다고 국회에 직접 해명을 할 정도였다. 학교 자료를 불태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학교다”라고 지적했다. 박사모 회장의 '관기' 발언 관련 고소 2008년 6월 13일 박근혜 지지모임인 박사모의 정광용 회장이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당시 한나라당 의원인 나경원을 "사또가 바뀌면 아무에게나 달려드는 관기"라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8년 6월 27일 나경원은 박사모 회장 정광용을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고소 1년후인 2009년 10월 26일 서울중앙지검은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을 모욕한 혐의로 지명수배 중이던 박사모 정광용 회장을 구속했다. 구속 하루만인 2009년 10월 27일 박사모 카페 게시판에 "본인 정광용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나경원 의원님을 모욕한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정광용 회장 명의의 사과문이 게재되었다. 2009년 10월 30일 서울중앙지법은 나경원 측의 고소 취하로 정광용을 석방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나경원이 초선 의원이던 시절 부친이 설립자이고 자신이 이사로 있던 홍신학원 재직 교사들로부터 불법 정치후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불법 후원금 수수 의혹에 대해 나경원은 2011년 10월 18일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후원자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모르겠다고 밝히면서 초창기에 일부 교사가 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집단적으로 냈다는 얘긴 전혀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나경원은 이어 교사들이 낸 후원금을 돌려줄 의향이 없냐는 물음에 후원금이나 정치자금은 해당 연도가 지나면 돌려주지 못한다고 답했고, 누가 후원금을 냈는지 검토해보지 않았냐는 거듭된 질문에도 소액으로 들어왔는지 여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후 오마이뉴스는 나경원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2004년 정치자금 수입명세서를 입수해 확인한 결과 거기에 일부 기부자의 직업이 교원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과 해당 교원들의 전화번호가 흥신학원 소속 학교의 국번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오마이뉴스는 또한 2004년 당시 흥신학원 재단 소속 학교에 근무하던 교사들로부터 학교측의 기부 종용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때 여러 교사들이 나경원 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는데, 일부 교사들은 교사의 정치후원금은 불법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부에 질의를 했고 이에 대해 교과부는 초중등교원은 정치기부행위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이처럼 일개 교사도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판사출신인 나경원 의원이 불법인줄 몰랐겠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한편, 나경원은 2011년 10월 20일 K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는 2004년 당시에는 공무원들도 선거 정치자금을 내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교과부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교과부 교원복무 담당자는 전화통화에서 교원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규정은 1949년 제정된 이래 바뀐 적이 없었고 따라서 교사의 정치자금 기부가 합법이었던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 문제는 특히 정치후원금을 제공한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일부 전교조 교사들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한겨레신문은 사설을 통해 나경원에게 후원금을 낸 교사들이 유무형의 압력에 시달렸을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특히 한나라당이 민노당에 1~2만원의 후원금을 낸 교사들을 문제삼았다는 점 때문에 나경원의 정치자금 수수는 더욱 파렴치하게 여겨진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 역시 "전교조 교사들이 민노당을 후원한 일로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으며 고통받고 있는데 법조인 출신 나 후보가 이 사실을 잘 모르겠다고 회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재산 신고 허위 기재 의혹 2011년 10월 19일,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는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가 700만 원이라고 재산 신고한 2캐럿 다이아몬드에 대해 금은방에 가서 직접 물어봤다. 1억 5000~1억 7000만 원을 얘기했다. 700만 원짜리는 공업용 다이아몬드나 가능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경원 후보측은 "해당 반지는 나 후보의 시어머니가 23년 전에 준 것"이라며 "나 후보가 재산공개를 하려고 23년 전 결혼할 때 받은 반지의 가격을 몰라 시어머니에게 물었더니 '700만원'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며, 2014년 7.30재보궐 당시에는 전문감정법인의 감정을 받아 1600만원으로 수정신고하였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 파면 청원 논란 2018년 1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던 나경원 의원이 국제올림픽위원회와 국제패럴림픽위원회에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보내 논란을 빚었다. 이후 나경원 의원의 올림픽 조직위원 직 파면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게시되었고 2018년 2월 19일 36만 905명이 동참해 ‘한 달 내 20만 명 이상 참여’라는 청와대의 답변 기준을 충족했다. 이에 청와대 김홍수 교육문화비서관은 "서한 발송이 조직위 정관에서 정한 해임사유인지 여부는 청와대로서는 알 수 없다. 조직위는 사유에 따라 위원총회 의결을 거쳐 조직위원장이 위원을 해임할 수 있게 돼 있다."고 답변하며 청와대에는 해임 권한이 없음을 밝히고 논란을 일단락 시켰다. 논란에 대해 나경원 의원은 "남북 단일팀은 선수 당사자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은 정치적 쇼잉에 불과하며 인생을 쏟아부은 선수들이 정권의 정치쇼에 희생당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남북단일팀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현 정권도 알고 있다"며 "그런데도 정권은 단일팀을 강행했고, 이는 국제 사회에 마치 한국인들이 단일팀을 지지하는 듯한 인식을 줄 우려가 있었다."고 밝혔다.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나 의원은 "일부 여권인사들이 내가 예전엔 북한 선수들의 평창 참가를 독려했으면서 이제 와서 말을 바꿨다고 하는데 사실을 완전히 잘못 얘기하는 것"이라며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정당한 북한 선수단의 올림픽 참여에 찬성하고, 북한 선수단 관계자들을 수차례 만나 이와 같은 의사를 전달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정치적 쇼잉의 단일팀은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나경원 비서 막말 논란 2018년 5월 21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 비서인 박창훈씨가 평소 페이스북에서 나경원 의원을 비판한 중학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막말과 협박을 해 논란이 일었다. 공개된 통화 녹음 파일에 따르면 "부정선거로 당선된 XX들이 뭔 말이 많아", "김대중·노무현이 나라 팔아먹었지. 문재인도 나라 팔아먹고 있지." 라는 말과 함께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지. 어디서 나가서 죽고 XX이야. 왜 죽었는데? X팔리니까 그런 거야.", "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심한 짓도 많이 했는데 그냥 죽었지. 국민에 의해 사형당한 거야." 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 및 비하하는 발언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 내가 찾아갈게, 너희 학교로. 한번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며 해당 중학생이 위협을 느낄 듯한 발언도 있었음이 확인됐다. 논란이 일자 나경원 의원의 비서인 박창훈씨는 페이스북에서 “30대 중반이 넘은 어른으로 중학생에게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점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제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반성하겠다”고 밝혔으며 나경원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의원실 소속 비서의 적절치 못한 언행으로 인해 피해를 본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전적으로 직원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고 사과했다. 이어 “해당 직원은 본인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 고성 산불 정의용 안보실장 이석 지연 사건 2019년 4월 5일 강원도 고성에서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을 당시 국회 운영위원해 전체 회의에 청와대 업무보고 중이던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의 이석을 막아 논란이 되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나경원은 “저녁 식사 시간 ‘산불의 심각성으로 안보실장이 먼저 이석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바가 전혀 없다”며 오후 9시 30분쯤 홍 원내대표가 불이 났는데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저희는 심각성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서너분 질의 예정이라 길어야 30∼40분이니 끝나고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당시 동영상에서는 홍 원내대표는 회의 중 고성 화재의 심각성에 대한 설명을 하고 안보실장 이석에 대한 양해를 구하였으나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10시 38분 이 지나서야 정의용 안보실장은 이석할 수 있었다. `문빠·달창` 발언 논란 2019년 5월 11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자유한국당 대구 장외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특별대담을 언급하며 “KBS 방송사 기자가 요새 문빠, 달창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대통령한테 독재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지도 못하냐. 묻지도 못하는 거, 이게 바로 독재 아니냐”고 발언하였다. 해당발언이 논란이 되자 “문 대통령의 극단적 지지자를 지칭하는 과정에서 그 정확한 의미와 표현의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특정 단어를 썼다”며 “인터넷상 표현을 무심코 사용해 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한나라당 7,613,660 표 35.76% 비례대표 11번 초선 총선 18대 국회의원 서울 중구 한나라당 23,609 표 46.7% 1위 재선 10·26 재보선 35대 시장 서울특별시 한나라당 1,867,880 표 46.21% 2위 낙선 민선 5기 7·30 재보선 19대 국회의원 서울 동작구 을 새누리당 38,311 표 49.9% 1위 3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서울 동작구 을 새누리당 44,457 표 43.41% 1위 4선 

각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평화신문, 기사. ↑ 가 나 유인숙 . “나경원… 그녀는 누구인가?”. 중구신문. ↑ 강연곤; 박수균 . “이색취미 '별난 의원들'”. 문화일보. ↑ 디지털뉴스부 . “비즈니스앤 '강인선 Live', "나경원, 미모보다는 따뜻함으로~"”. 한국재경신문. ↑ 가 나 정차모 . “인터넷언론 신문법 등 관계법 적용해야”. 여수인터넷뉴스. ↑ 가 나 김승련; 이정은 . “30代 女판사 한나라당 입당…나경원씨 선대위 특보로”. 동아일보. 2014년 9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21일에 확인함. ↑ “ '여대생들이 닮고 싶은 여성 정치인' 나경원 의원”. 스포츠한국. 2010년 10월 29일. ↑ “부부 법조인 라이벌? 동반자?”. 문화일보. 2006년 3월 11일. ↑ “장애아를 위한 모임 'We Can'창립총회”. 매일경제. 2004년 7월 18일. ↑ 안수찬 . “법복 벗고 대선 맞수로!”. 한겨레21. ↑ 박종진 . “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 주간한국. ↑ 한동수 . “나경원판사 한나라 입당 사표”. 서울경제. ↑ 가 나 “대선 후 갈린 두 전직판사의 '명암'”. 오마이뉴스. 2003년 2월 12일. ↑ 진영태. 홍준표·나경원, 로펌 '바른'서도 한때 한솥밥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서울경제. 2011년 7월 11일. ↑ 김근철 . “역풍 휘말린 최병렬·홍사덕 체제”. 경향신문. ↑ “한나라 공천심사위원장 김문수”. 서울경제신문. 2003년 12월 29일. ↑ 김진형 .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44명 확정”. 머니투데이. ↑ 박해영; 양준영; 최명진 . “17대 초선의원은 '공부중'”. 한국경제. ↑ 박민혁 . “"룸살롱 안가겠다" 당선자들 이색 '나의 다짐'”. 동아일보. ↑ 박민혁 . “한나라당 초재선 의원 12명, 중도보수지향 '푸른모임' 발족”. 동아일보. ↑ 최문선; 박상준 . “상임委 지원, 전문성 보다 지역구 챙기기”. 한국일보. ↑ 이한기; 최경준 . “운영위원장 천정배, 법사위원장 최연희 의원 당선”. 오마이뉴스. ↑ 이완수 . “장애인 차별해소 몸소실천 女정치인”. 해럴드경제. ↑ 김병수 . “한, 공동대변인에 임태희 의원”. 연합뉴스. ↑ “나경원, 장애 남학생 알몸 목욕봉사 논란”. 노컷뉴스. 2011년 9월 28일.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42710580371774&outlink=1, 머니투데이 ↑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PRC_U0O9X1X0Y2L7C1V0Q3X7E5X4O8E0Z2,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특수교육 1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0734, 특수교육 2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1572, 특수교육 3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1715, 특수교육 4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8620, 이상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금감위 “적극검토” 내부결론 내려 :: 네이버 뉴스 ↑ “김정태 국민은행장 중징계 감리위원 다수가 반대했다” :: 네이버 뉴스 ↑ 한나라당 "관제데모 의혹은 새빨간 거짓말" - 오마이뉴스 ↑ 초선의원들 `국감 에필로그' 눈길 연합뉴스, 2004-10-24 ↑ 나경원 "자문위 기본법 제정 추진" 연합뉴스,2004-10-24 ↑ 윤호우 . “ 누가 누가 잘했나”. 위클리경향. ↑ 김영래 . “한나라 '당 쇄신' 착수…조직정비 단행·연금법 당론 확정”. 파이낸셜뉴스. ↑ 한나라당 불참 속 사학법 개정안 통과 :: 네이버 뉴스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野의원 13명,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제출,2005-04-03 ↑ 안만호 . “오세훈, 선거캠프 구성 돌입”. 파이낸셜 뉴스. ↑ “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 연합뉴스. 2006년 7월 18일. ↑ 한국일보 : 한나라 주류체제 강화 인사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나경원 :: 네이버 뉴스 ↑ 조선닷컴 . “한나라 '입' 나경원, 대변인 사퇴 의사”. 조선일보. ↑ 홍영림 . “나경원, 신은경 압도…서울 강북동 '예측불허'”. 조선일보. ↑ donga.com -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 "나경원 의원, 왜 악플이 줄어들지 않냐고요?" - 프레시안 ↑ donga.com -한나라, 종교차별 금지 법안 제출 ↑ 나경원 “어청수 자진사퇴해야” : 국회·정당 : 정치 : 뉴스 : 한겨레 ↑ 사사건건 국정원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 ↑ 인권위 “사이버모욕죄·국정원법 개정 신중해야”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고흥길, 연막 피우다 ‘땅땅땅’ : 국회·정당 : 정치 : 뉴스 : 한겨레 ↑ 한나라 ‘문방위 5인방’ 강경론 주도…3명이 조·중 출신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224854 ↑ 서울시장 보궐선거 최종투표 결과 위키트리 ↑ “나경원 불출마 "어차피 당이 공천 안 했을 것"”. 2012년 4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4월 16일에 확인함. ↑ ““‘지적장애인’ 사회적 인식·처우 개선되는 발판 되길””. 문화일보. 2013년 1월 9일. ↑ “"스페셜올림픽, '장애인도 같은 사회구성원' 인식 갖는 계기"”. 조선닷컴. 2012년 12월 29일. ↑ “김연아·황영조·양준혁, 평창스페셜올림픽 성공기원 걷기대회 참가”. 마이데일리. 2012년 10월 18일. ↑ “평창스페셜올림픽 '평창선언' 주목”. 노컷뉴스. 2013년 1월 30일. ↑ “평창스페셜올림픽 폐막…성공적 평가 등 주간 뉴스”. 에이블뉴스. 2013년 2월 13일. ↑ “2013년 스포츠계 10대 뉴스...문체부 선정”. 머니위크. 2013년 12월 14일. ↑ “ 평창올림픽 초석 다진 스페셜올림픽”. 강원일보. 2013년 2월 21일. ↑ “장애인과 함께 걷기…16일 제3회 ‘투게더 위 워크’ 개최”. 국민일보. 2014년 11월 7일. ↑ “롯데그룹, 장애인 지원 '슈퍼블루 캠페인' 선포”. 연합뉴스. 2014년 10월 23일. ↑ “나경원 스페셜올림픽 회장, 20일 장애인 자립 응원행사 벌여”. 뉴시스. 2014년 12월 20일. ↑ “장애인·비장애인 함께한 ‘제1회 슈퍼블루마라톤’ 성료”. 에이블뉴스. 2015년 10월 27일. ↑ “평창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 '폐막'”. 연합뉴스. 2015년 8월 11일. ↑ “LA 스페셜 올림픽 화려한 폐막..한국 81개 매달”. RK Media. 2015년 8월 3일. ↑ “김연아,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참석 ‘韓 선수단과 함께’”. 뉴스엔. 2015년 7월 27일. ↑ “국회 외통위원장에 나경원, 여성의원 선출 헌정사상 최초…176표 ‘압도적’”. 동아닷컴. 2015년 2월 26일. ↑ “국회 외통위원장에 나경원, 208표 가운데 176표 얻어 당선…헌정사상 최초 여성 선출”. MBN. 2015년 2월 26일. ↑ “한나라 ‘北 인권안 참여 촉구’ 결의안”. 국민일보. 2005년 10월 31일. ↑ “새누리당 나경원 외통위원장 "진정한 북한 인권 개선 위해선 국회가 북한인권법 조속 처리해야"”. 아시아일보. 2015년 6월 24일. ↑ “나경원 "북한인권법 처리, 약속 지켜라" 野, '나 몰라라'”. 뉴데일리. 2015년 12월 6일. ↑ “나경원 "한미관계 굳건하게" 美의회에 서한”. 연합뉴스. 2015년 3월 7일. ↑ “외통위, 한중FTA 비준동의안 의결…보완촉구 결의안도 채택”. 연합뉴스. 2015년 11월 30일. ↑ “한중 FTA, 협상타결 1년여·정식서명 반년만에 비준동의”. 연합뉴스. 2015년 11월 30일. ↑ “외통위, 日 강제징용시설 유산등재 '반대' 방문 외교 나서”. 뉴스1. 2015년 6월 9일. ↑ “나경원 "멕시코와 경제교류·안보협력 공감대 형성"”. 연합뉴스. 2015년 11월 14일. ↑ “국회 외통위 '北 핵실험 규탄 결의안' 채택”. 포커스뉴스. 2016년 1월 7일. 2016년 2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11일에 확인함. ↑ “국회 외통위, 미·러 주한대사 만나 북핵 제재 안보리 결의 요청”. 포커스뉴스. 2016년 1월 11일. 2016년 2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11일에 확인함. ↑ “나경원 "北 올바른 선택하는데 국제제재 한 목소리 필요"”. 연합뉴스. 2016년 1월 21일. ↑ “나경원 "美, 전략적 자산 추가배치 등으로 中 압박해야"”. 연합뉴스. 2016년 1월 27일. ↑ “ 파리 방문 중인 나경원 외통위원장,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방북 제안”. 중앙일보. 2015년 12월 8일. ↑ “IMF총재 만난 나경원, 北개혁·개방 협력 요청”. 뉴시스. 2015년 7월 23일. ↑ “국회 외통위원들, 2년 만에 방북”. 한국일보. 2015년 11월 2일. ↑ “새누리당 탄핵 찬성 44명 명단 나왔다”. 중앙일보. 2016년 12월 9일. ↑ “무색해진 국회선진화법…7년 만에 국회 몸싸움 되풀이”. 2019년 7월 20일에 확인함. ↑ “나경원, 국회 공전 장기화에 한국당 ‘출구전략’ 찾기 고심”. 2019년 7월 20일에 확인함. ↑ “국회 정상화 합의안 퇴짜 나경원, 리더십 깊은 상처”. 2019년 6월 24일. 2019년 7월 20일에 확인함. ↑ “흔들리는 나경원 리더십”. 2019년 7월 1일. 2019년 7월 20일에 확인함. ↑ 추승호; 강영두 . “<한, 국보법 논의 '백가쟁명'>”. 연합뉴스. ↑ 전광삼 . “국보법 "현행 유지" "전면 폐지"”. 서울신문. ↑ 이철호 . “정무위 파행, "11월 처리" "국감먼저" 진통”. 세계일보. ↑ 구성수 . “신용카드 사태, 카드사·당국·소비자의 '합작 불량품”. 노컷뉴스. ↑ 김익태 . “방카 폐해 집중 추궁..확대 연기 주장”. 머니투데이. ↑ 김용석 . “정무위, 공정위 국감-통신시장 규제 주체 논란”. 전자신문. ↑ ↑ “나경원 딸 성신여대 부정 입학 의혹 논란”. 2016년 3월 18일. 2018년 5월 1일에 확인함. ↑ “‘공짜 점심은 없다’...나경원 딸 성신여대 부정입학”. 2018년 5월 1일에 확인함. ↑ www.etnews.com . “‘나경원 딸 부정입학’ 보도한 기자 1심서 무죄 선고”. 《대한민국 IT포털의 중심! 이티뉴스》. 2018년 5월 1일에 확인함. ↑ NEWSIS. “'나경원 딸 부정입학' 뉴스타파 기자, 1심서 무죄”. 2018년 5월 1일에 확인함. ↑ 이재성; 유선희 . “자위대 서울 행사에 한나라 의원 참석 논란”. 한겨레. ↑ “수요스페셜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 편”. KBS. 2008년 10월 15일. 2007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 “나경원, `7년 전 日자위대행사 참석' 논란”. 연합뉴스. 2011년 9월 21일. ↑ “정대협,“나경원에 자위대 행사니 참석 말라는 공문 보냈다””. 경향신문. 2011년 9월 23일.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111435=%7C출판사=한겨레신문%7C날짜=2011-09-23}} ↑ 송수연 . “강재섭 'BBK설립과 소유는 별개'”. 뉴데일리. ↑ 고영득 . “"'나'라고 한적 없다" 나경원 대변인 패러디 화제”. 경향신문. ↑ 이은영 . “'부드러운 입'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이 털어놓은 대선 비화”. 신동아. ↑ ““1등 신붓감 예쁜 여자선생님, 2등은 못생긴…” 나경원 ‘여교사 비하’ 논란 확산”. 경향신문. 2008년 11월 17일. ↑ “정세균은 되고 나경원은 안된다?”. ↑ 정세균, 유시민 면죄부, 나경원만 마녀사냥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31674 ↑ “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 성공 이끈 나경원… 그녀의 인생을 말하다”. 조선일보. 2013년 3월 9일. ↑ “'정동영 비난했던 한나라당, 나경원은?”.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27일. ↑ “나경원, 장애 남학생 알몸 목욕봉사 논란”. 노컷뉴스. 2011년 9월 28일. ↑ “나경원 "봉하마을ㆍ내곡동 사저 모두 비판 소지"”. 연합뉴스. 2011년 10월 17일. ↑ 나경원 ‘자화자찬’ 국제망신 “트위터 오류 아냐” 본사확인"경향신문" 2001년 10월 21일 기사 ↑ “나경원, 관련 없다던 아버지 학교서 10년째 이사”《한겨레》2011년 10월 19일 ↑ 윤태곤 기자 . “박사모 회장 "나경원 관기" 발언 논란, 나경원측 "여성비하 발언 묵과 못해"”. 프레시안. 2011년 9월 9일에 확인함. ↑ 연합뉴스 . “나경원, 박사모 정광용 회장 ‘명예훼손’고소”. 한겨레. 2011년 9월 9일에 확인함. ↑ 신호 기자 . “나경원 의원 모욕한 '박사모' 회장 구속”. 뉴데일리. 2011년 9월 9일에 확인함. ↑ 박석철 . “'까다로운 박사모' 나경원 의원엔 백기?,정광용 회장 구속 하루만에 사과문, 전여옥 의원 때완 틀려”.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9일에 확인함. ↑ “'나경원 모욕' 박사모 정광용 회장, 고소 취하로 석방”. 민중의소리. 2009년 10월 30일. 2011년 9월 9일에 확인함. ↑ 나경원 "교사 후원금 수수, 정확히 모르겠다" 머니투데이, 2011년 10월 18일 ↑ 나경원, 교사인줄 알고 정치자금 수수했다 오마이뉴스, 2011년 10월 23일 ↑ '나경원 정치자금',불법인줄 알고도 받았나 오마이뉴스, 2011년 10월 21일 ↑ <사설> 나경원 후보, 이러고도 도덕성 말할 자격 있나한겨레신문, 2011년 10월 19일 ↑ "나경원, 아버지 학교 교사들에게 정치후원금 받았다" 프레시안, 2011년 10월 18일 ↑ 김미영 . “나경원, 3년 전 700만원이라던 2캐럿 다이아 반지 1600만원으로 신고”. 이투데이. 2017년 4월 15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나경원 평창조직위 파면’ 청원에 靑 답변 “조직위 권한””. 중앙일보. 2018년 3월 6일. 2018년 5월 24일에 확인함. ↑ “나경원 "단일팀은 정치적 쇼잉...현송월 야단법석 북에 잘못된 메시지 줘"”.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나경원 '막말 비서' 들끓는 여론…녹취 파일 속 내용 보니”. JTBC. 2018년 5월 23일. 2018년 5월 24일에 확인함. ↑ “속초·고성 산불에도 발묶인 안보실장..나경원 "與, 양해 구한 바 없다"”. 20190405091508. 2019년 5월 25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 비디오머그 . “산불 심각성 몰랐다는 나경원 의원...이제 와서 남 탓?”. 《유튜브》.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 월간조선뉴스룸 I '문빠', '달창' 뜻이 뭐길래?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정확한 유래 몰랐다" 사과 ↑ 매일경제 I 나경원 "문빠·달창발언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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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경원&oldid=24679710" 분류: 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196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나주 나씨서울특별시 출신계성초등학교 동문숭의여자중학교 동문서울여자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대한민국의 판사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대한민국의 변호사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친이자유한국당 당원숙명여자대학교 교수홍익대학교 교수서울대학교 교수숭실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인용 오류 - 날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인용집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8월 5일 15: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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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리스트는 식별된 일부 실체들이 특정 권한, 서비스, 이동, 접근, 인식에 대해 명시적으로 허가하는 목록이며, 이에 대한 과정은 화이트리스팅이라고 한다. 반의어는 블랙리스트이다. 


 이메일 화이트리스트 스팸 필터는 이메일이 거부되거나 정크 메일 폴더로 보내지는 일을 막기 위해 특정 송신자 IP 주소들, 이메일 주소들 또는 도메인 이름들을 화이트리스트에 포함시키는 기능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들은 사용자에 의해 또는 시스템 관리자에 의해 수동으로 관리될 수 있으나 외부의 화이트리스트 서비스를 참조할 수도 있다. 

[같이 보기]
 블랙리스트 클로즈드 플랫폼 

각주 ↑ e.g. Kindle users control the whitelist for email access. Besides Amazon itself, only e-mail addresses whitelisted by the device's registered owner can send content to that device. 

 List of email whitelist services 이 글은 기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화이트리스트&oldid=24669292" 분류: 스팸컴퓨터 보안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악성 소프트웨어사회적 지위데이터베이스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기술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NederlandsPolskiSimple English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8월 3일 13: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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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불매운동:: 보이콧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gIsProbablyEditable":!0 "ready" "ext.centralNotice.startUp" 보이콧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보이콧은 항의의 수단으로 항의 대상과의 거래를 끊거나 항의 대상과 관련한 상품의 구매, 사용을 중단하는 자발적인 소비자 운동의 하나이다. 


[어원]
 베니티 페어에 실린 찰스 C. 보이콧의 캐리커처 보이콧이라는 말은 ‘찰스 보이콧’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는 아일랜드 메이요주의 지주인 언 백작의 부재 중 재산관리인이었다. 1880년 아일랜드토지연맹은 착취로부터 토지 임차인을 보호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언 백작의 재산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지역 노동자들을 철수시켰다. 보이콧이 캠페인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도리어 연맹에 의해 지역 사회에서 고립됐다. 이웃들은 그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고 가게들은 그에게 물건을 팔지 않았다. 지역 노동자들은 그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찰스 보이콧이 관리하는 토지의 경작물 수확을 돕기 위해 50명의 오렌지 당원이 카반과 모나한 지방에서 왔다. 1,000명의 경찰과 군인이 마요 지방의 클래어모리스 마을에서부터 그들을 호위했다. 찰스 보이콧은 지역사회로부터 추방됐지만 해를 당할 염려는 없었다. 수확이 끝난 후에도 캠페인은 계속 됐다. 1880년 12월 1일 보이콧은 관재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다. 마이클 다빗은 《아일랜드 봉건 제도의 붕괴》라는 책에서 "보이콧"이라는 단어를 "보이콧처럼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것"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법적 의미

반이스라엘 보이콧을 요구하는 시위자들 노동법에서의 보이콧 노동조합에 의한 쟁의의 한 방법이다. 즉 쟁의 중 그 기업의 제품을 조직적·집단적으로 구매하지 않도록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사용자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제법에서의 보이콧 어떤 나라의 국민이 공동으로 특정 국가의 상품을 불매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발적 불매가 공동 불매로 돼버린 경우, 국가책임은 물을 수 없다. 구분 1차 보이콧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정치적 단체가 회원과 일반 시민에게 노동쟁의나 정치적 분쟁과 관련된 회사의 제품의 불매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1차 보이콧은 일반적으로 노사 교섭 중에 발생한다. 2차 보이콧 노동자가 파업이나 1차 보이콧의 대상이 된 특정 회사와의 거래를 중단할 것을 다른 회사에게 요구하는 운동이다. 사례 미국 독립혁명 때 미국은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였다.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간디는 영국 상품 불매 운동 등을 포함한 스와데시 운동을 주도했다. 중국은 5·4 운동 중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함께 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시절 한국은 국산품 애용 운동을 포함하는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나치 독일은 반유대주의 감정으로 유대인 회사에 대한 보이콧을 했다. 아랍 연맹은 영토 문제로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을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미국을 포함한 80개 국가는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포함한 14개 국가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같이 보기 엠바고 무저항주의 윤리적 소비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보이콧&oldid=24667115" 분류: 불매동맹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БългарскиCatalàНохчийн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سنڌي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8월 2일 23: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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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특징 2 개발 과정 및 시판 2.1 개발 관련 일화 3 관련 상품 3.1 포카리 스웨트 이온 워터 3.2 포카리 스웨트 스테비아 3.3 분말 포카리 스웨트 3.4 빈스타크 포카리 스웨트 4 대한민국에서의 광고 5 

(참조) 6 갤러리 7 같이 보기 8 

특징 

흔히 알칼리성 음료수라는 이미지가 강하나 사실 산성 음료이다. 그러나 몸 안에 들어오면 산성에서 알칼리성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 음료를 알칼리성 음료라고 말한다. 이 음료의 조성은 인체의 체액 조성과 매우 가까운 이온 농도로 되어있어, 운동 및 발한 등 수분 손실이 심한 상황에서의 수분 보충에 매우 용이하다. 맛을 내기 위해 소량의 자몽 과즙을 사용했으며, 과즙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표기한 대한민국의 제품과는 달리 일본 제품에는 무과즙이 제품에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정말 과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과즙이 매우 적게 들어 있어 그렇게 표기한다. 현재는 동남아시아를 시작으로 여러 해외 국가에 수출하고 있으며 이집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진출국가아시아국가이며는 일본,한국,중화권,베트남,캄보디아,태국,미얀마,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루나이,필리핀,동티모르,오만,아랍에미레이트,사우디,쿠웨이트,카타르,바레인,이집트이며 공장은 한국,중국,대만,일본 ,인도네시아 에만 있다. 

 

개발 과정 및 시판 

이 제품이 개발되기 전, 생리식염수가 인체에 수분을 보급하는 데 가장 효율이 좋다는 것을 옛 일본 육군과 여러 연구기관에서 연구한 바 있었다. 일본 오츠카 제약 측은 오래전부터 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주사액용 생리식염수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게토레이가 생리식염수의 조성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장시간의 수술을 끝내고 피로에 지친 의사가 생리식염수를 수분공급을 위해 식용으로 사용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오츠카 제약은 자회사의 생리식염수 제품을 기초로 개발을 진행해 나갔다. 각종 이온농도를 세밀하게 조정하여 사람의 체액에 가장 가까운 조성 및 삼투압이 되도록 했다. 또한 선행상품인 게토레이에 대항하기 위해 제품의 맛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아코의 소금맛 만두을 힌트로 소금맛과 단맛을 절묘하게 맞추어 넣게 되었다. 이후 1980년 일본에서 245ml 캔이 처음 발매되었고, 가격은 당시 120엔. 처음의 캔의 구조는 일반의 캔음료와는 달랐고, 상하의 평면부분에 독특한 굴곡이 들어가 있었다. 또,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이유 때문에 음료수 디자인에서 거의 채용되지 않던 청색을 캔 디자인으로 선택해 청량감을 강하게 부각시켜, 훗날 스포츠 음료의 이미지를 결정짓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동아제약 식품사업부가 1987년 5월에 250ml 캔 제품을 최초로 출시하였다. 개발 관련 일화 포카리 스웨트의 제품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일부 고위직 인사들로부터 '상품으로서 약하다', '팔리지 않는다' 등의 부정적 의견이 나왔었다. 하지만 제품의 샘플을 살펴본, 당시 오쓰카 마사히코 오츠카 제약 사장이 '이것은 팔린다'라는 호언장담으로 인해 이 제품의 제품화가 진행되었다. 광고 등 모든 인쇄지가 제작된 상황에서, 그룹회사였던 오츠카 식품의 사원으로부터 '식품 종류의 제품에는 파란색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지적이 나와, 제품이 순조롭게 팔려 나가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오츠카 제약 측은 공황상태였다. 파란색을 채용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약 전문이었던 오츠카 제약 측의 영업 및 개발자 일동이 당시 완고하게 지켜지던 식품업계의 '파란색의 터부'를 알지 못했던 것에 있다. 결국 이러한 무지가 파란 데 담은 이유와 더불어 여러 후일담을 만들어 그 후일담이 오츠카 제약의 광보 및 개발자가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잡지 등에서 이야기되었다. 관련 상품 아래 소개된 상품들 중 포카리 스웨트 이온 워터, 포카리 스웨트 스테비아, 빈스타크 포카리 스웨트는 대한민국에서 판매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는 포카리 스웨트 캔과 페트병 제품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분말 포카리 스웨트는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판매하지는 않지만 인터넷 쇼핑을 이용해 구입할 수 있다. 포카리 스웨트 이온 워터 2006년 발매. 이온농도를 조절하지 않고, 칼로리만을 100ml당 8kcal로 낮추고, 단맛도 없앤 제품다. 포카리 스웨트 스테비아 1990년 발매. 스테비아의 잎에서 추출한 스테비오사이드를 설탕대신 사용한 제품이다. 칼로리는 100ml당 11kcal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7월 시판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판매되지 않는다. 분말 포카리 스웨트 분말을 생수에 타서 마시는 제품이다. 분말 팩 한개의 크기는 가로 11 cm, 세로 15cm이며, 휴대성이 용이하고 일반 캔 제품보다 값싸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캔 제품 대용으로 많이 사용하며, 군인 장병을 위한 선물로 애용된다. 판매는 한 봉지 씩이 아닌 세트 단위로 묶어서 판매하고 있다. 빈스타크 포카리 스웨트 유아용으로 농도를 희박하게 만들었고, 과즙이 들어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판매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의 광고 포카리 스웨트는 1987년에 출시되어 '몸은 이온 음료를 원합니다.','땀 흘린 뒤 바로 포카리 스웨트'를 처음 광고 모토로 내세웠다. 같은 해 수영 선수 최윤희를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 90년대 고현정, 김규리, 2000년대 손예진, 한지민 그리고 2010년대에는 문채원, 양진성을 거쳐 2015년 제25대 광고 모델로 김소현을 내세워 청순한 이미지를 통해 '포카리 스웨트는 몸이 원하는 알카리성 이온 음료. 포카리 스웨트가 나의 몸을 깨어나게 한다'는 모토를 강조했다. 또 CM 송이 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의 광고는 '생활 속에 필수, 포카리 스웨트'라는 모토로 생활 속에서 수분 보충을 위해 꼭 필요한 음료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017년 제26대 광고 모델로 인기 걸그룹 트와이스가 모델로 발탁되었다. 

(참조) ↑ “동아오츠카 연혁 참고”. 2007년 7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 “동아오츠카”. 2007년 6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갤러리 포카리 페트병 「ION WATER」포카리 이온워터 대만에있는 포카리간판 홍콩에있는 포카리자판기 한양대학교 안에있는 포카리자판기 중국의 포카리 병 일본의 500ml포카리병 같이 보기 게토레이 파워에이드 아쿠아리우스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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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포카리_스웨트&oldid=24595922" 분류: 청량음료스포츠 음료일본의 음료1980년 도입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Bahasa Indonesia日本語Nederlands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9일 13: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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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주제별 읽기2019. 8. 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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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유니클로:: 유니클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9월" "site.styles":"ready" "ext.wikimediaEvents" 유니클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주식회사 유니클로Uniqlo Co., Ltd 형태 주식회사 산업 분야 패션소매 국가 일본 본사 소재지 일본야마구치현 야마구치 시 사야마 717번지 1호 도쿄도 미나토 구 아카사카 9초메 7번 1호 미드타운 타워 핵심 인물 야나이 다다시 제품 의류 자본금 10억 엔 매출액 3,936억 엔 자산총액 2,090억 4,700만 엔 주요 주주 주식회사 패스트 리테일링 웹사이트 공식 사이트

 

 유니클로는 1974년 일본에서 설립된 캐주얼 의류 업체이다. 1984년 일본 히로시마에 1호점을 열면서 의류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롯데쇼핑이 유니클로 일본 본사와 합작으로 에프알엘코리아를 설립하여 대한민국내 유니클로 영업을 하고 있다. 

목차 1 국가별 회사정보 1.1 대한민국 2 역사 2.1 일본에서의 역사 2.2 SPA전략 3 주요 프로젝트 3.1 디자이너 초청 3.2 티셔츠 프로젝트 4 콜라보레이션 4.1 i am OTHER 4.2 Best of +J 4.3 르메르, 카린 로이펠트 4.4 JW 앤더슨 5 


 국가별 회사정보 일본 외에도 영국, 프랑스, 대한민국, 미국, 중국에 지사가 있다. 대한민국 회사명 - 에프알엘코리아 / FRL Korea Co., LTD. 

대표이사 - 배우진, 코사카 타케시 

설립일자 - 2004년 12월 16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36, 서울파이낸스센터 24, 25층 자본금 - 240억원 출자비율 - 롯데쇼핑 49.0%, 패스트 리테일링 51.0% 사업내용 - 한국 내에서의 「유니클로」브랜드의 의류 등의 수입, 판매 점포수 - 180개 2011년 11월 11일 서울 명동에 아시아에서 가장 큰 초대형 매장을 개장했을 때 12억 8000만원의 하루 매출을 기록했다. 이 매출 규모는 한국 내 패션 아울렛에서 기록한 최고 기록이다. 2017년 현재 한국 내에 180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 일본에서의 역사 일본 도쿄에 위치한 매장 1949년 3월부터 일본 야마구치현에는 Ogori shoji라는 회사가 있었다. 1984년 5월부터, “Unique clothing warehouse”라는 이름으로 히로시마시 나카쿠에 유니섹스 캐주얼 의류매장을 열었다. 이 당시에 ‘유니클로’라는 이름이 탄생했으며, 이는 Unique clothing 의 줄임말이다. 1991년 10월에는 회사의 이름을 Ogori shoji에서 Fast retailing 으로 변경했으며, 1994년 4월까지 일본 전역에 100개의 유니클로 매장을 개점하였다. SPA전략 1997년에 Fast retailing 사는 미국의 GAP으로부터 SPA전략을 채택하였다. 유니클로는 그들의 의류생산을 중국의 공장으로 아웃소싱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은 심각한 경기 불황기였으며 저렴한 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유니클로의 광고전략 또한 생산적이었다. 1998년 10월, 도쿄의 번화가인 하라주쿠에 최초로 신식 유니클로 매장이 개점하였으며 곧 일본의 거대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001년에는 일본에서 500개가 넘는 매장으로 판매총액과 수익총액에서 신기록을 기록하였다. 유니클로는 세계무대에 진출하기로 결정했으며, 회사를 분할하여 중국에 Fast Retailing Apparel사를 설립하였다. 2002년에는 상하이에 첫 유니클로 해외매장이 개점하였으며 영국 런던에 4개의 매장이 개점하였다.그러나 영국에서의 실적은 저조했으며 일본에서의 재고는 넘쳤다. 결과적으로 2002년과 2003년에 유니클로의 이익총액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2004년에 유니클로는 일본의 패션 매거진과 합작투자를 시작했으며 노리카 후지와라와 같은 유명스타를 광고에 출연시켰다. 유니클로는 새로운 디자이너팀을 꾸렸으며, 영국을 포함해서 다시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Fast retailing 에서 다른 패션업체들을 인수한 것도 유니클로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2005년 유니클로는 뉴욕, 홍콩, 그리고 서울까지 확장하였으며 유니클로의 한국 진출은 롯데쇼핑과의 합작투자였다. 2005년 말 유니클로는 그들의 대외 주식에 추가하여 일본에서만 700개의 매장을 보유하였으며 2006년까지 판매총액은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그 당시 유니클로는 2007년 4월까지 총 100억 달러의 매출을 목표로 하였으며 H&M, GAP 등과 함께 의류소매업체 순위 5위안에 드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Fast retailing 은 2009년 3월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 와 유니클로 제품 디자인 컨설팅 계약을 맺기도 하였다. 주요 프로젝트 디자이너 초청 유니클로는 여성복 디자이너로서 Phillip Lim, Alice Roi, Tina Lutz, Marcia Patmos, Alper 그리고 GVGV를, 남성복 디자이너로서 Halb, Satoru Tanaka, Alexandre Plokhov를 초청했으며 2007 S/S 시즌에 디자인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2009년에는 추가적으로 4명의 디자이너와 회사를 섭외하였으며, 여성복 디자이너로서는 Steven Alan,과 Shipley & Halmos를, 남성복에서는 Gilded Age와 Opening Ceremony를 초청했다. 2012년 10월 유니클로는 프랑스의 Comptoir des Cotonniers와 협력하여 프랑스의 패션과 일본의 기술이 합쳐진 boxy-cut 스타일의 라이트 다운 포뮬러 자켓을 발표했다. Comptoir의 스타일 디렉터 Delphine Ninous는 “우리는 쉽고 정교하며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의 요소에 완벽히 적합한 모양을 사용하길 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티셔츠 프로젝트 2007년 4월 28일 유니클로는 도쿄 하라주쿠 매장에서 현대적인 티셔츠 컨셉트인 “UT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프로젝트 티셔츠들은 테니스 공 캔과 같이 생긴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스테인레스 전시 케이스에 있는 형태로 전시되었다. 이 티셔츠들은 개방된 진열대에 배치되어있어 쇼핑을 사실상 셀프 서비스로 만들어버렸다. 이 프로젝트는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했는데,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뮤지션 등이 참여하였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새로운 UT 프로젝트로 'Mickey Plays'를 발표하였고, 2015년 6월 22일 발매예정이다. 콜라보레이션 i am OTHER 퍼렐 윌리엄스는 2014년 4월에 ‘i am OTHER’라는 이름으로 유니클로에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 컬렉션은 UT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Nigo와 함께 제작되었다. Best of +J 유니클로는 2009년, 2011년, 그리고 2015년에 '질 샌더 X유니클로'라는 콜렉션을 발표하였다. 2015년 재발매된 컬렉션의 이름은 'Best of +J'로, 전 세계 15개국 매장에서 셔츠, 재킷, 바지, 드레스 등 다양한 제품이 판매되었다. 르메르, 카린 로이펠트 유니클로는 2015 F/W 시즌에 프렌치 감성을 대표하는 브랜드 및 인물과의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을 선보인다. 먼저 '르메르'는 프랑스 패션 브랜드인 라코스테와 에르메스의 여성복 디렉터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크리스토퍼 르메르와 그의 오랜 파트너인 사라-린 트랜이 선보이는 브랜드이다. 또한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카린 로이펠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탄생하는 약 40여 개의 제품들은 2015년 10월 중 공개될 예정이다. JW 앤더슨 영국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 JW 앤더슨과 협업한 ‘2019 S/S 유니클로 and JW 앤더슨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을 출시했다. 전세계적으로 밀레니얼 세대가 소비의 주축으로 부상하면서 패션업계에서도 스트리트 패션과 뉴트로 트렌드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2019 S/S 유니클로 and JW 앤더슨 콜라보레이션’ 컬렉션도 감각적인 캐주얼과 실용성과 위트를 겸비한 디자인으로 출시 이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출시 당일인 8일 오전에도 유니클로 롯데월드몰점 매장 오픈 1시간 전부터 대기줄이 형성되는 등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각주 ↑ Uniqlo posts record daily sales at new flagship store 코리아 헤럴드 2011.11.20 2013.5.15 확인 ↑ 유니클로 명동중앙점 `대박`...하루 매출 13억 이데일리 2011.11.18 2013.5.15 확인 ↑ 김, 유림. “규제는 피하고 로열티만 쏙!”. 《dongA.com》. ↑ http://www.japansociety.org/uniqlo_from_tokyo_to_new_york_to_global_brand ↑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215010008420 ↑ http://www.fashionbiz.co.kr/TN/?cate=2&recom=2&idx=145333 ↑ http://www.voguegirl.co.kr/content/view_04.asp? menu_id=03010100&c_idx=012007010000803&_C_=5 ↑ http://www.huffingtonpost.kr/2015/02/24/story_n_6741242.html ↑ http://www.g-enews.com/ko-kr/news/article/news_all/201505211006421148690_1/article.html ↑ “유니클로, ‘유니클로 and JW 앤더슨 콜라보레이션’ 출시! - UNIQLO”. 2019년 6월 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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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읽기2019. 8. 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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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일본 총리::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gRequestId":"XUgnHwpAMF0AAENtZ0oAAAAP" "ready" "ext.uls.compactlinks"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 内閣総理大臣 내각총리대신의 문장 현직:아베 신조 2017년 11월 1일 취임 관저 총리대신 관저지명자 국회임명자 천황임기 4년 이하초대 이토 히로부미성립 1885년 12월 22일 웹사이트 www.kantei.go.jp 일본의 정치 일본국 헌법 천황 국민 일본의 선거 일본의 정당 일본국 정부 행정부 내각 내각총리대신 국무대신 부대신 - 대신정무관 행정기관 입법부 국회 - 국회의원 중의원 참의원 사법부 재판소 - 재판관 - 재판원 최고재판소">최고재판소재판관) 하급재판소 지방정치 보통지방공공단체 특별지방공공단체">특별구, 일부사무조합, 광역연합、재산구) 지방의회 - 지방의회의원 수장">도도부현지사, 시정촌장) v • d • e • h 

 

일본 내각총리대신 관저 자위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내각총리대신기 내각총리대신, 통칭 총리대신 또는 수상은 일본의 정부수반이며, 내각의 수장인 국무대신이다. 일본국 헌법 조항에 따라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 의결에 의해 지명되고, 천황은 이를 임명한다. 자격은 국회의원이지만, 관례상 중의원과 참의원 의원의 투표로 중의원 의원 중에서 지명된다. 내각은 국회의 신임에 근거해 성립하며, 국회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중의원에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될 경우는 10일 이내에 총사직하거나 중의원을 해산해 총선거를 치러야 한다. 

목차 1 임기 2 자격 2.1 권한 3 생존중인 역대 내각총리대신 4 역대 내각총리대신 목록 5 같이 보기 6 

 임기 일본국 헌법에 의하면 4년 이하이다. 집권당의 총재나 대표를 지명하는 것이 관례이며, 여당이 과반의석일때 여당의 대표가 바뀌면 법적인 내각총리대신 임기가 남아있더라도 새로운 여당 대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하는 것이 관례이다. 일본의 정당들은 당 대표에 대해 임기와 연임 제한을 두고 있기에, 여당이 바뀌지 않는 한 실질적인 임기는 당 대표 임기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 많다. 자격 내각총리대신과 기타의 국무대신은 문민이어야 한다. 내각총리대신은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 의결로 지명한다. 이 지명은 다른 모든 안건에 우선하여 행한다. 천황은 국회의 지명에 기초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한다. 권한 국무대신의 임면권 국무대신의 재임 중 소추에 동의하는 것 내각을 대표해 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 내각을 대표해 일반 국무 및 외교 관계에 대해서 국회에 보고하는 것 내각을 대표해 행정 각부를 지휘·감독하는 것 법률 및 정령에 주임 국무대신과 연대 서명하는 것 내각회의를 주재 하는 것 내각총리대신 및 주임 국무대신의 대리를 지정하는 것 행정 각부의 처분 또는 명령을 중지하게 한 뒤 내각의 조치를 기다릴 수 있는 것 긴급사태의 포고를 발하는 것 포고시 경찰의 통제 자위대의 최고 지휘감독권 무력 공격 사태의 발생이나 발생이 임박하였다고 인정되는 사태시에 자위대의 전부 또는 일부에 출동을 명하는 것 간접 침략 또는 그 외의 긴급사태에 즈음하여 일반의 경찰력으로는 치안의 유지가 힘들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자위대의 전부 또는 일부에 출동을 명하는 것 방위출동 또는 치안출동에 의한 자위대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출동 명령이 있었을 경우에, 특별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해상보안청의 전부 또는 일부를 그 통제하에 두게 할 수 있는 것. 무력 공격 사태 등에 대한 대처 기본 방침이 정해졌을 때에는, 내각에 설치되는 ‘무력 공격 사태 대책본부’의 대책본부장으로 필요한 권한을 실시한다 상기 14조의 종합 조정에 근거해 필요한 대처 조치가 실시되지 않는 경우,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지방공공단체의 장등에 대해, 대처 조치를 실시 할 것을 지시하는 것 기상청 장관으로부터 지진예지 정보의 보고를 받았을 경우에, 지진 방재 응급 대책을 실시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내각회의를 통하여 지진 재해에 관한 경계 선언을 발표하는 것 재판소에 의한 행정 처분 등의 집행정지에 대해서 이의를 진술하는 것 생존중인 역대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가이후 도시키 후쿠다 야스오 모리 요시로 호소카와 모리히로 아소 다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노다 요시히코 역대 내각총리대신 목록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입니다. 같이 보기 일본 정부 입법부 국회 참의원 중의원 행정부 일본 내각 국무대신 사법부 일본의 재판소 일본 최고재판소 수상 직선제: 총리를 선거권을 보유한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뽑는 방안으로 일본 정치권과 학계에서 빈번히 거론되고 있음 

 위키미디어 공용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총리 관저 홈페이지 일본 내각 목록 vdeh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태정관달 69호메이지 시대 이토 히로부미 1885-1888 구로다 기요타카 1888-1889 야마가타 아리토모 1889-1891 내각 관제 규정메이지 시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1891-1892 이토 히로부미 1892-1896 마쓰카타 마사요시 1896-1898 이토 히로부미 1898 오쿠마 시게노부 1898 야마가타 아리토모 1898-1900 이토 히로부미 1900-1901 가쓰라 다로 1901-1906 사이온지 긴모치 1906-1908 가쓰라 다로 1908-1911 사이온지 긴모치 1911-1912 다이쇼 시대 가쓰라 다로 1912-1913 야마모토 곤노효에 1913-1914 오쿠마 시게노부 1914-1916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6-1918 하라 다카시 1918-1921 다카하시 고레키요 1921-1922 가토 도모사부로 1922-1923 야마모토 곤노효에 1923-1924 기요우라 게이고 1924 가토 다카아키 1924-1926 와카쓰키 레이지로 1926-1927 전전 쇼와 시대 다나카 기이치 1927-1929 하마구치 오사치 1929-1931 와카쓰키 레이지로 1931 이누카이 쓰요시 1931-1932 사이토 마코토 1932-1934 오카다 게이스케 1934-1936 히로타 고키 1936-1937 하야시 센주로 1937 고노에 후미마로 1937-1939 히라누마 기이치로 1939 아베 노부유키 1939-1940 요나이 미쓰마사 1940 고노에 후미마로 1940-1941 도조 히데키 1941-1944 고이소 구니아키 1944-1945 스즈키 간타로 1945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1945 시데하라 기주로 1945-1946 요시다 시게루 1946-1947 일본국 헌법전후 쇼와 시대 가타야마 데쓰 1947-1948 아시다 히토시 1948 요시다 시게루 1948-1954 하토야마 이치로 1954-1956 이시바시 단잔 1956-1957 기시 노부스케 1957-1960 이케다 하야토 1960-1964 사토 에이사쿠 1964-1972 다나카 가쿠에이 1972-1974 미키 다케오 1974-1976 후쿠다 다케오 1976-1978 오히라 마사요시 1978-1980 스즈키 젠코 1980-1982 나카소네 야스히로 1982-1987 다케시타 노보루 1987-1989 헤이세이 시대 우노 소스케 1989 가이후 도시키 1989-1991 미야자와 기이치 1991-1993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1994 하타 쓰토무 1994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4-1996 하시모토 류타로 1996-1998 오부치 게이조 1998-2000 모리 요시로 2000-2001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1-2006 아베 신조 2006-2007 후쿠다 야스오 2007-2008 아소 다로 2008-2009 하토야마 유키오 2009-2010 간 나오토 2010-2011 노다 요시히코 2011-2012 아베 신조 2012-2019 레이와 시대 아베 신조 2019-현재 시대의 분류는 취임 날짜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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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읽기2019. 8. 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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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공차:: 공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gMonthNames":["" "ext.globalCssJs.user.styles":"ready" "ext.visualEditor.desktopArticleTarget.init" 공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공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공차Gong cha 산업 분야 식음료 창립 2006년 국가 타이완 본사 소재지 타이완공차 코리아 핵심 인물 김여진 웹사이트 www.gong-cha.co.kr/brand/ 공차는 타이완 가오슝에서 2006년 설립된 밀크 티 브랜드이다. 2010년대 초반 일어난 타피오카가 들어간 밀크 티 선풍을 타고 2012년 한국에 상륙하여 우후죽순처럼 한국에 개점한 대만 밀크 티 브랜드 중 가장 많은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2017년 1월에 공차코리아가 타이완 본사를 인수하였다. 

목차 1 역사 1.1 설립 초기 1.2 개점 1.3 매출 2 브랜드 특징 3 제품 3.1 오리지널 티 3.2 공차 스페셜 3.3 티라떼 3.4 밀크 티 3.5 그린티 에이드 3.6 후르츠티 3.7 스무디 3.8 커피 4 주문 방식 5 각주 6 

 역사 설립 초기 공차는 김여진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평범한 주부였으며 남편을 따라 싱가포르에 거주하다가 싱가포르 지점 '공차'에서 확신을 얻어 직접 대만 본사를 찾아갔다. 집을 담보 대출 받아, 한국 판권을 획득했다. 2012년 공차 코리아를 설립하여 대만 현지에서 공차 운영을 배워 2년 만에 전국 240개 매장을 보유한 프랜차이즈 회사로 키워냈다. 2014년 10월, 사모펀드 유니스 캐피탈에 공차코리아 지분 65%를 340억에 매각한다. 이 당시 김여진 대표는 32세였다. 이후 체육 관련 스타트업에 종사하여 400평 규모의 '바운드 트램펄린 파크'를 만든다. 반포, 잠실, 구로에 지점을 열고 이어서 대구 신세계 백화점에도 입점하는 확장성을 보여줬던 이 사업은 주식회사 아이에스동서에 235억에 매각하는 성과를 보였다. 개점 현재 이 문단은 주로 대한민국에 한정된 내용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지역에 대한 내용을 보충하여 문서의 균형을 맞추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1년에 한국 법인을 설립하고 2012년에 1호점을 홍대에 오픈한다. 3개월 후인 7월에 신촌점에 입점하게 된다. 2013년 4월에 가맹점 1호를 성신여대에 오픈하고, 6개월 후에는 100호점이 입점한다. 2014년에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소아환우에 기부금을 전달하고, 다음달 5월에는 "어린이에게 새생명을"기부금을 전달한다. 6월에 200호점을 돌파하여 12월에는 현대백화점 전점에 입점한다. 2015년 3월에는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되고 4월에 300호점을 오픈한다. 2018년 9월부터 일본에 진출을 시작한다. 2016년 3월에 매경 '100대 프랜차이즈'에 선정되고 4~5월에 일본 지점을 추가로 오픈한다. 7월엔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에 공식 협찬사로 지정되고 10월부터 공차의 모델로 '이종석'을 기용한다. 2017년 3월에는 매경 '100대 프랜차이즈'에 2년 연속 선정되는 성과를 올린다. 매출 공차의 매출액은 2016년 기준 764억 원이다.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은 140억 원 수준인데 전년 동기 대비 75% 늘고, EBITDA는 170억 원으로 65% 증가했다. 공차는 2016년 매출액 기준 일본시장에서 224%, 베트남시장에서 378%, 미국 뉴욕시장에서 121%로 대폭 성장했다. 매출액 80,593,216,087 69,271,629,787 매출원가 52,638,514,212 49,972,632,114 매출총이익 27,954,701,875 19,298,997,673 판매비와관리비 17,815,285,625 14,900,258,176. 브랜드 특징 공차의 브랜드 이름은 바칠 공, 차 차로 중국 황실에서만 맛 볼 수 있었던 고급 차를 바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브라운은 펄, 레드는 Tea의 레드 색상을 의미한다. 공차의 국적은 타이완이다. 유니슨캐피탈에 따르면 공차 경영권을 한국 기업인 공차 코리아가 가지고 있더라도 공차는 여전히 대만 브랜드로 간주된다. 공차 코리아가 공차의 글로벌 본사이지만 공차의 정체성은 타이완 문화와 관련이 있다. 유니슨캐피탈이 일본계 PEF이므로 공차 코리아 또한 실질적으로 일본계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RTT를 인수하는 데 들어간 자금은 100% 한국 자본이고 운용 인력도 모두 한국인이며 창업주가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유니슨캐피탈을 일본계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제품 다음과 같은 제품이 제공된다. 오리지널 티 쟈스민 그린티, 우롱티, 블랙티, 얼그레이티 공차 스페셜 밀크폼 그린티, 밀크폼 우롱티, 밀크폼 블랙티, 밀크폼 얼그레이티, 밀크폼 윈터멜론티 티라떼 초콜렛 티라떼, 타로 티라떼, 블랙 티라떼, 그린 티라떼 밀크 티 그린 밀크 티, 우롱 밀크 티, 블랙 밀크 티, 얼그레이 밀크 티, 윈터멜론 밀크 티, 타로 밀크 티, 카라멜 밀크 티, 초콜렛 밀크 티, 차이 밀크 티 그린티 에이드 자몽, 애플, 망고, 청포도, 레몬 후르츠티 허니 레몬티, 허니 자몽티 스무디 블랙 밀크 티 크러쉬, 망고 스무디, 초코 쿠앤크 스무디, 밀크 쿠앤크 스무디, 청포도, 제구 그린티 스무디, 레몬 요구르트 스무디, 타로 스무디 커피 더블 그린 카페라떼, 아메리카노, 얼그레이 아메리카노, 밀크폼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카라멜 카페라떼, 더블 화이트 카페라떼. 주문 방식 티 메뉴의 선택과 토핑 선택, 당도와 얼음량의 조절을 통해 주문할 수 있으며, 토핑은 밀크폼, 펄, 코코넛 , 알로에, 화이트펄이 제공되며 이 중 3개를 선택할 수 있다. 각주 ↑ 정빛나 기자 . “공차코리아, 대만 본사 인수…한국브랜드 된다”. 연합뉴스. ↑ “평범한 주부에서 거부가 된 김여진 대표, 다음 행보는?”. 《매경프리미엄》. 2018년 3월 23일. ↑ 공들여 맛있는 차 공차. “공차”. ↑ “공차코리아, 유니슨캐피탈 만나 수익성 쑥↑”. 《더 벨》. 2017년 5월 17일. ↑ dart 전자 공시 시스템. “공차 매출액”. ↑ “한국? 대만? 헷갈리는 공차의 정체성”. 《이데일리》. 2017년 10월 5일. ↑ 공들여 맛있는 차 공차. “공차”. ↑ 공들여 맛있는 차 공차. “공차”. 

 공차 - 공식 웹사이트 공차 - 공식 웹사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차&oldid=24679379" 분류: 타이완의 레스토랑 체인타이완의 음료회사찻집2006년 설립된 기업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8년 5월일부 지역만을 다루는 글/2018년 5월일부 지역만을 다루는 모든 글문단에 세계화가 필요한 글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客家語/Hak-kâ-ngî日本語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8월 5일 14: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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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은 한 천체가 다른 천체 주위를 원이나 타원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을 말한다. 천문학에서 일컫는 공전은 은하 내의 항성들이 은하 중심에 대하여 도는 것도 공전이라고 부른다. 다만 공전 운동 중심에 항상 천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질량 차이가 크지 않은 2개의 항성이 쌍성계를 구성하고 있는 경우, 항성계의 질량 중심은 두 별 사이의 공간에 존재한다. 공전의 주체는 항성이나 행성, 위성에 국한되지 않고 티끌이나 가스 등인 경우도 많이 있다. 태양계의 경우 목성, 토성, 천왕성의 고리는 먼지나 얼음 등이 작은 입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런 입자들이 행성 주위를 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블랙홀의 경우 빨려 들어가는 물질이 블랙홀 주위에 강착 원반을 형성하여 공전 운동을 하고 있다. 공전 운동의 원천이 되는 중력원의 질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행성 공전주기의 제곱이 궤도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이 성립된다. 은하 내부를 도는 항성의 공전 운동의 경우 은하 물질이 은하 중심부터 바깥 영역에 걸쳐 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항성의 공전 운동은 은하 중심에서 그 항성 위치까지 분포하는 은하 물질 전체에서 받는 중력에 의해 정해진다. 예 은하계의 지구가 속한 태양계를 예로 들면 지구는 다른 행성 및 유성등과 함께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 한편 태양은 스스로 자전을 하지만 동시에 턔양계 입장에서 이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공전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태양은 또한 여전히 항성이기도 함으로 은하계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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