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시사YBM 박 DB
영시박 1-1::Dream Big and Achieve Your Goals. You are 17 years old. A wonderful age! Like all young people, you are full of hopes and expectations. At this important time in your life, I'd like to tell you about two people who realized their dreams. Put Your Dreams on Paper It is a common practice among successful people to write down their dreams on paper. They make lists of dreams and put them where they will see and read them often. They will put them under a glass cover on their desk or carry them about in their pocket so that they will be constantly reminded of the goals they set for themselves. The following story is about John Goddard, an adventurer, explorer, and writer. In 1972, he was featured in LIFE, a famous American magazine, as a man who achieved his teenage dreams.::꿈을 크게 꾸고 여러분의 목표를 이루세요. 여러분은 17살입니다. 얼마나 멋진 나이입니까! 모든 젊은이들처럼 여러분은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이 중요한 시점에,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꿈을 이룬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꿈을 종이에 기록하세요 자신의 꿈을 종이에 적는 것은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 공통적인 관행입니다. 그들은 소망 목록을 작성해서 자신이 자주 보고 읽는 곳에 그것들을 둡니다. 그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책상 유리 커버 밑에 넣어 두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다음 이야기는 모험가이자, 탐험가이며, 작가인 John Goddard에 관한 것입니다. 1972년 그는 미국 의 유명한 잡지인 LIFE지에 자신의 10대 시절의 꿈을 이룬 사람으로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영시박 1-2::One rainy afternoon in 1940, sitting at his dining room table, the 15-year-old Goddard hit upon a plan. He wrote "My Life Goals" on a sheet of paper. Then he wrote down 127 goals for himself. Some of the items would be relatively easy to achieve, such as visiting the Great Wall of China and joining the Boy Scouts. The list included other goals that involved excitement or adventure, such as sailing around the world and flying an airplane. Showing a strong interest in exploring unknown places, Goddard also wanted to set foot on the moon and climb Mt Everest. What made John Goddard record his dreams on paper? He remembered that a friend of his dad's regretted not doing all the things he wanted to when he was John's age. He thought, "I never want to miss an opportunity to do things that I dream of." He carried the wish list everywhere he went and tried throughout his life to turn his dreams into reality. When LIFE introduced Goddard's story with the title "One Man's Life of No Regrets," he had already realized 104 of his list of 127 dreams! He had carried out a number of adventurous explorations, including the first solo kayak trip down the length of the Nile River and standing on the top of Mt Kilimanjaro.::1940년 어느 비 내리는 날 오후에, 주방 식탁에 앉아 15세 소년 Goddard는 계획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한 장의 종이에 '나의 인생 목표'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127개의 목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 항목들 중 일부는 중국의 만리장성 방문하기와 보이 스카우트 입회하기처럼 상대적으로 달성하기 쉬운 것들이었습니다. 목록에는 세계 항해하기와 비행기 조종하기와 같이 흥분과 모험을 수반한 다른 목표도 포함했습니다. 미지 세계의 탐험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이며 Goddard는 또한 달에 발을 내딛고 에베레스트산에 오르기도 원했습니다. 그 무엇이 John Goddard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종이에 기록하게 했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친구가 John의 나이였을 때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다 하지는 못한 것에 대해 후회했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나는 내가 소망한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소원 목록을 자신이 어디에 가든지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일생동안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최초로 혼자서 카약을 타고 나일강 전체를 내려가고 킬리만자로산 정상에 오른 것을 포함해서, 여러 모험적 탐험을 완수했습니다.
영시박 1-3::Your Enthusiasm Will Pay off. Can only people of unusual talent achieve their goals? Certainly not. Thomas Edison, the great inventor, once said,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The famous Korean ballerina Kang Sue Jin is a case in point. Kang Sue Jin fell in love with ballet at the age of 14, a very late start for anyone who desires to be outstanding at the art. At the age of 16, she entered the Monaco Royal Ballet School where, at first, she was very anxious because other students performed far better than her. To master the necessary skills, she practiced for 15 hours a day. Her enthusiasm for ballet made her practice the moves hundreds, even thousands of times, until she perfected each one. In 1985, her constant effort helped her win the grand prize in a famous international competition in Lausanne, Switzerland.::여러분의 열정은 보상받을 것입니다.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발명가 Thomas Edison은 언젠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이 이에 적합한 예입니다. 강수진은 14세에 발레와 사랑에 빠졌는데, 이는 이 예술 분야에서 탁월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늦은 출발입니다. 16세에 그녀는 모나코 왕립 발레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처음에 그녀는 다른 학생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잘했기 때문에 매우 불안해했습니다. 필요한 기술을 완벽히 익히기 위해 그녀는 매일 15시간 연습했습니다. 그녀의 발레에 대한 열정은 그녀로 하여금 각각의 발레 동작을 완벽하게 할 때까지 수백 번, 심지어 수천 번 연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85년,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녀로 하여금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유명한 국제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도록 도왔습니다.
영시박 1-4::Sue Jin's toes became out of shape due to the long hours of hard work. Although her toes may look ugly, many people say they are the most beautiful feet in the world. Sue Jin has said, "Put all of your energy into any goals that you want to achieve. Success comes only as the result of a long and painful process." Limitless dreaming is a privilege of the young. Your dreams, however, are not something to be caged in your mind. Without recording them somewhere, they may end up as nothing more than wild fantasies. Of course, recording your dreams is not enough. You also need to make a plan and make every effort to achieve your dreams. That enthusiastic effort will become the driving force to help you overcome the difficulties that challenge you in the course of achieving your goals.::수진의 발가락들은 오랜 시간 동안의 부단한 노력 때문에 형태가 일그러졌습니다. 비록 그녀의 발가락들이 못생겨 보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발가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말합니다. 수진은 "여러분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를 쏟으세요. 성공은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때에만 그 결과로서 찾아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한한 꿈을 꾸는 것은 젊은이들의 특권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꿈은 마음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꿈을 어딘가에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단지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러분의 꿈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계획을 세우고 여러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열정적 노력은 꿈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영시박 2-1::Animal Expressions in English. What do animals have to do with the English language? A whole lot! You'll be surprised to know just how many English expressions involve animals. Consider some of the fascinating ways in which animals are involved in everyday English. Let's begin with a basic linguistic process, the analogy. An analogy is a comparison between two things and a convenient way for language to create new meanings. Animals are usually used because they are familiar to everyone. By way of analogy, animal expressions draw on the similarities between animals and humans. People who are not courageous are called "chickens," while brave leaders are said to be "lionhearted." In most cases, it is not hard to see the logic behind the comparisons.::영어의 동물 표현. 동물과 영어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아주 많은 관련이 있답니다! 얼마나 많은 영어 표현이 동물과 관련되어 있는지 안다면 놀랄 겁니다. 일상 영어에서 동물이 관련된 매혹적인 방식들을 좀 살펴보세요. 기본적인 언어적 프로세스인 비유로부터 시작합시다. 비유는 두 가지 사물을 비교하는 것으로 언어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보통 동물이 활용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동물 표현은 동물과 인간의 비슷한 점을 끌어냅니다.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닭(겁쟁이)'라고 불리고 용감한 지도자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용맹한)'이라고 표현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비유 뒤에 숨은 논리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영시박 2-2::Animal analogies are based on close observation of animal behavior. However, what if the casual observation leads to false assumptions, or misinterpretation gets in the way? Interestingly, this has often been the case with English animal expressions. Crocodile tears is a good example. One is said to weep "crocodile tears" if they pretend to be sad when they are not. The idea comes from the popular belief that crocodiles weep over the prey they kill. The fact is, crocodiles seem to cry while they eat, but this is because their eyes are stimulated when the muscles around the mouth move to eat. Their tears are only a physical response with nothing to do with feelings. Making a beeline also belongs to the group of animal expressions based on flawed observation. A beeline typically means a straight line between two points. If you "make a beeline for" someone or something, you go straight toward your destination, ignoring everything else along the way. For instance, your mom might have told you to make a beeline home after school. Now you may wonder if bees really fly straight to where they want to go. The answer is, usually they do not. As you may have observed, they make irregular twists and turns in their flight. They often stop to rest and take a long way around. It is only when they return home with a load of honey that they make a straight line. In the case of the bee, only part of the truth came to represent the whole.::동물 비유는 동물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는 데 근거합니다. 그러나 별 생각 없는 관찰이 잘못된 가정으로 이어지거나, 오해가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흥미롭게도 영어의 동물 표현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악어의 눈물'은 좋은 사례입니다. 슬프지도 않은데 슬픈 척하는 사람을 보고 '악어의 눈물'을 흘린 다고 합니다. 이 생각은 악어가 자기가 죽이는 먹잇감을 놓고 운다는 대중적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악어들은 먹이를 먹는 동안 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입가의 근육이 먹기 위해 움직일 때 그들의 눈이 자극을 받기 때문입니다. 악어의 눈물은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는 신체적 반응에 불과합니다. '벌길을 만들다(최단거리로 가다, 일직선으로 가다)'역시 결함이 있는 관찰에 근거한 동물 표현에 속합니다. '벌길'은 전형적으로 두 지점 사이를 연결하는 직선을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해 '벌길을 만든다'고 하면 중간에 있는 다른 모든 걸 무시하고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여러분에게 방과 후 곧장 집으로 오라고(벌길을 만들라고) 말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벌들이 정말로 가고 싶은 곳까지 똑바로 날아가는지 궁금해질지도 모르겠네요. 정답은, 보통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보았을 수도 있지만, 벌들은 비행하면서 불규칙하게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 중간에 종종 쉬기 위해 멈추기도 하고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합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건 오로지 꿀을 잔뜩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뿐입니다. 벌의 경우에는, 진실의 일부가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시박 2-3::Even though many people know that these analogies are not based on science, the expressions do not easily disappear in the language. In fact, partly due to these expressions, some people still hold the belief that crocodiles weep and bees always fly straight to their destination. Sometimes, the meaning of analogies may not be obvious. For instance, what comes to mind when you hear the phrase "white elephant" or "black sheep"? Most people, hearing these phrases for the first time, cannot correctly guess their meanings. The expression "white elephant" comes from Thailand. Long ago, in Thailand, white elephants were very rare. Whenever one was found, it was given to the king. The king would then give it as a royal "gift" to someone he did not like since the beautiful animal cost a fortune to take care of. Nobody could refuse such a present, but it could financially ruin its owner. Moreover, it was a serious crime to mistreat a present from the king. Even riding it was not allowed, so a white elephant was almost useless. The expression, introduced in England in the 18th century, turned out to be useful for describing costly but useless public buildings. Today, it is used to refer to anything that might be costly and useless to someone.::이런 비유가 과학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더라도 표현 자체가 언어에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어느 정도는 이런 표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악어는 눈물을 흘리고 벌들은 항상 목적지로 곧장 날아간다고 믿고 있기도 합니다. 가끔, 비유의 의미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흰 코끼리'라든가 '검은 양'이라는 어구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어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지 못합니다. '흰 코끼리'라는 표현은 태국에서 왔습니다. 옛날 태국에서 흰 코끼리는 아주 귀했습니다. 흰 코끼리가 발견될 때마다 왕에게 진상되었지요. 그러면 왕은 그것을 왕이 하사하는 '선물'이라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주었는데, 그 이유는 이 아름다운 동물은 돌보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선물을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주인을 재정적으로 파산시킬 수도 있었어요. 게다가 왕이 내린 선물을 잘못 다루는 건 중죄였습니다. 심지어 타고 다니는 것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흰 코끼리는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18세기에 영국에 도입되었는데, 값비싸지만 쓸모없는 공공건물을 묘사하는 데 유용하다는 게 밝혀졌지요. 오늘날, 이 표현은 누군가에게는 값비싸지만 쓸모없을지 모르는 물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영시박 2-4::Black sheep, like white elephants, are not common, and they also mean trouble for their owners. The expression is from the English history of sheep farming. Long ago, black wool was worthless because it was almost impossible to dye. When a black sheep was born, the owners saw it as bad luck. Today the expression "black sheep" refers to an odd and unpopular member of a family or a group, perhaps because the unpopular black sheep stood out in a group of white sheep. These interesting expressions are only a few examples of the English expressions having to do with animals. Watch for others as you learn more English. Be curious about them and research their roots. It is a fun way to learn the language.::흰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검은 양은 흔치 않고, 역시 소유자에게는 골칫거리를 뜻합니다. 이 표현은 영국 목양 산업의 역사로 부터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검은 양털은 염색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치가 없었습니다. 검은 양이 태어나면 주인은 그것을 불운으로 여겼지요. 오늘날 '검은 양'이라는 표현은 가족이나 집단에서 특이하고 인기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아마 인기 없는 검은 양이 흰 양 떼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흥미로운 표현들은 동물과 관련이 있는 영어 표현 중 단지 몇 가지의 예시에 불과합니다. 영어를 더 배우는 과정에서 다른 것들도 찾아보세요. 호기심을 가지고 어원을 공부해 보세요. 언어를 배우는 재미있는 한 가지 방식이랍니다.
영시박 3-1::Food Festivals Around the World. Most celebrations cannot be held without food, whether they are birthdays, weddings, or holidays. Sometimes, however, food itself is the reason to celebrate. Whether you like trying unusual foods such as garlic ice cream or worm milkshake, or just enjoy learning about foreign dishes, food festivals are often held to celebrate the food traditions of the region where they take place. Here are some unique food festivals, from fish to fruit to side dishes. Why don't you stop by and try some of the tasty food offerings, if ever you have a chance to travel to one of these regions and come upon a food festival? International Mango Festival New Delhi, India June–July Summers and mangoes go hand in hand in India. The International Mango Festival, held every year in the summer, celebrates everything about mangoes. It features many events and activities associated with the mango, including mango eating competitions, quizzes, and mango carving.::세계의 음식 축제. 생일 잔치이건, 결혼식이건, 명절이건 대부분의 축하 행사는 음식이 없이 열릴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음식 자체가 축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마늘 아이스크림이나 벌레가 들어간 밀크셰이크와 같은 특이한 음식을 먹어 보고 싶든, 아니면 그저 외국 음식에 대해 배우는 것을 즐기든, 음식 축제는 종종 그 축제가 열리는 지역의 음식 전통을 기념하고자 열린다. 여기 생선에서부터 과일, 반찬에 이르기까지 몇몇 독특한 음식 축제가 있다. 해당 지역 중 한 곳을 여행하다가 음식 축제를 마주치게 된다면 한번 들러서 맛난 음식을 좀 맛보는 것은 어떨까? 국제 망고 축제 인도 뉴델리, 6월-7월 인도에서는 여름과 망고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국제 망고 축제는 매년 여름마다 열리는데, 망고에 관한 모든 것을 기념한다. 그것은 망고 먹기 대회, 퀴즈, 그리고 망고 조각하기를 포함한 망고와 관련된 많은 행사와 활동을 특징으로 한다.
영시박 3-2::Started in 1987, the festival exhibits more than 550 varieties of mangoes and provides a rare opportunity to taste them all for free. Various products based on mangoes, such as mango juice and mango ice cream, are offered while chefs from famous restaurants present new recipes that include mangoes. Maine Lobster Festival Rockland, Maine, US. August The Maine Lobster Festival is a celebration of dishes made from fresh lobsters caught off the coast of Maine. The first festival was held in 1947 as a one-day event. Now it is a five-day festival. At cooking contests that use lobsters as the main ingredient, visitors can taste unusual dishes, including lobster Caesar salad and lobster wraps. Visitors to the festival can also enjoy other local seafood dishes such as shrimp and steamed clams, either as street food or in restaurants. The festival also has a parade and a race called the Great International Lobster Crate Race, in which participants run over lobster crates floating in the harbor, sometimes falling into the cold water. Many volunteers help the organizers hold this festival, and almost one ton of lobsters are served to both locals and visitors from outside the region.::1987년에 시작된 그 축제에는 550 종류가 넘는 망고가 전시 되는데, 그것들을 모두 무료로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망고 주스와 망고 아이스크림 같은 망고를 재료로 한 다양한 상품이 제공되는 한편, 유명 식당의 요리사들이 망고를 포함한 새로운 요리법을 선보인다. 메인 바닷가재 축제 미국 메인주 록랜드, 8월 메인 바닷가재 축제는 메인주의 연안에서 잡힌 신선한 바닷가재로 만든 요리를 기념하는 축제이다. 첫 축제는 1947년에 하루 행사로 열렸다. 이제 그것은 5일 동안의 축제이다. 바닷가재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요리 대회에서, 방문객들은 바닷가재 시저 샐러드와 바닷가재 랩 샌드위치를 포함하여 독특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또한 새우와 조개찜 같은 이 지역의 다른 해산물 요리를 길거리 음식으로, 또는 식당에서 즐길 수 있다. 그 축제에는 또한 시가행진과 '국제 바닷가재 상자 경주'라 불리는 경주가 열리고, 이 경주에서 참가자들은 항구에 떠 있는 바닷가재 상자 위를 달리는데, 때로는 차가운 바닷물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행사) 조직 위원회가 축제를 개최하는 것을 도와주며, 거의 1톤의 바닷가재가 지역 주민과 다른 지역에서 오는 방문객들에게 제공된다.
영시박 3-3::Baltic Herring Festival Helsinki, Finland October. Every year in early October, Helsinki's harbor changes into a lively, colorful set for the Baltic Herring Festival, first held in 1743. Fishermen from all over Finland bring their latest catch to Helsinki to take part in one of Finland's oldest festivals. Sellers in bright orange tents line the harbor and sell herring in every imaginable form:fried, pickled, smoked, in bottles, in cans, in soup, on pizza, and in sandwiches. The choices are endless. On the first day of the festival, competitions are held to select the most delicious seasoned herring and the best herring surprise. Herring surprise is a traditional dish made with herring, cheese, and onions. The winner of each competition is awarded a trophy. Music performances, cooking shows, and a kids' concert take place at the festival. For those who do not regard herring as their favorite food, there are many boats and street food shops offering other traditional Finnish food, including warm salmon soup.::발트해 청어 축제 핀란드 헬싱키, 10월. 매년 10월 초에, 헬싱키의 항구는 발트해 청어 축제를 위한 활기차고 다채로운 곳으로 변하는데 (그 축제는) 1743년에 처음 개최되었다. 핀란드 전역의 어부들이 핀란드의 가장 오래된 축제 중 하나에 참가하기 위해 최근에 잡은 청어를 헬싱키로 가지고 온다. 밝은 주황색 텐트 안의 상인들은 항구를 따라 늘어서서 튀김, 절임, 훈제, 병조림, 통조림, 수프, 피자, 샌드위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청어를 판다. 선택의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축제 첫날에는 가장 맛있는 청어 절임과 최고의 청어 서프라이즈를 뽑는 대회가 열린다. 청어 서프라이즈는 청어, 치즈, 양파로 만든 전통 요리이다. 각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트로피가 수여된다. 음악 공연, 요리 쇼,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가 축제에서 열린다. 청어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연어 수프를 포함해서 핀란드의 다른 전통 음식을 제공하는 배와 거리 음식점이 많이 있다.
영시박 3-4::Gwangju World Gimchi Festival Gwangju, Korea, October. The Gwangju World Gimchi Festival celebrates Gimchi, a traditional Korean dish made of salted vegetables with a variety of seasonings such as red pepper and garlic. First held in 1994, the festival is one of the largest food festivals in Korea and offers an unusual opportunity for visitors to taste many different kinds of Gimchi from Jeolla-do. Visitors to the festival can enjoy a variety of activities. Anyone who loves the Gimchi of this region will not only be able to taste it but also have a chance to learn to make it. Among the many kinds of Gimchi featured in the demonstrations are Baechu Gimchi and Gat Gimchi. There is a competition to pick the best Gimchi, as well as another one for foreigners to demonstrate their Gimchi-making skills. Volunteers offer free Gimchi cooking lessons for anyone who wants to learn some new recipes.::광주 세계 김치 축제 한국 광주, 10월. 광주 세계 김치 축제는 소금에 절인 야채를 붉은 고추와 마늘 같은 갖은 양념과 버무려 만드는 한국의 전통 음식인 김치를 기념한다. 1994년에 처음 열린 이 축제는 한국에서 가장 큰 음식 축제 중 하나이며, 방문객들이 전라도의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축제에 오는 방문객들은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이 지역의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치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김치를 담그는 법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시연에서 특별히 다뤄지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 중에는 배추김치와 갓김치가 있다. 외국인들이 김치 담그는 솜씨를 보여 주는 다른 대회뿐만 아니라 최고의 김치를 선정하는 대회도 열린다. 새로운 요리법을 배우고 싶은 누구에게든 자원봉사자들이 무료 김치 요리 수업을 제공한다.
영시박 4-1::A Survival Story from Hurricane Sandy. Every year, newspapers from around the world cover huge ocean storms that hit different regions. These storms leave thousands of people injured or dead, while forcing others to run away from their homes. They also give rise to amazing stories of survival. Here is a story of a young man who survived Hurricane Sandy, one of the most violent storms ever to hit the United States. A lady named Christine at Toms River, New Jersey, where the hurricane hit hard, was lucky enough to escape from her house before the storm hit. When she returned to her damaged house, after the storm had passed, she found a note. Whoever reads this, I'm DYING – I'm 28 years old. My name is Mike. I had to break into your house. I am very cold. I didn't take anything. A wave threw me out of my house down the block. I don't think I'm going to make it. The water outside is at least 10 feet deep. I cannot be rescued. Tell my dad I love him and I tried to get out. His number is ***-***-****. His name is Tony. I hope you can read this. I'm writing it in the dark. Goodbye. God help me.::허리케인 샌디 생존기. 매년 전 세계의 신문에는 각기 다른 지역을 강타한 거대한 태풍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이 태풍이 수천 명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잃게 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은 집을 떠나게 한다. 또한 태풍은 놀라운 생존기를 낳기도 한다. 여기 소개하는 이야기는 미국을 강타한 사상 최대의 태풍 중 하나였던 허리케인 샌디로부터 살아남은 한 청년의 생존기이다. 허리케인이 강타한 뉴저지주의 톰스 리버에 살던 Christine이라는 여인은 다행히 허리케인이 닥치기 전에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파손된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 이것을 발견하는 분은 읽어 주세요.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28살입니다. 제 이름은 Mike이고요. 저는 당신 집에 침입해야 했습니다. 무척 춥네요. 아무 것도 훔치지는 않았어요. 제 집에서 파도에 쓸려서 멀리까지 떠내려갔어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밖에 물이 최소 10피트는 되는 것 같아요. 구조될 수 없겠죠.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탈출하려고 노력했었다고 전해 주세요.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 성함은 Tony입니다. 이 메모를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안녕히.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영시박 4-2::Christine did not know if Mike survived. She called the number on the note, but no one answered. She then posted the note and the story on her SNS. The sad message made the rounds on social media for some time, before falling into the hands of a local radio station show host. After several tries, the radio show host finally located Mike and heard his story. On the day of the storm, Mike was watching the news on the television when he heard a loud noise outside. He went to the door to see what the noise was all about. As soon as he opened the door, he was not able to move. The water in the street outside his house was high and had risen quickly. In a moment, the water rose to the level of the door, starting to fill his house. And then the water carried him back to his kitchen. The entire house would soon be under water. He realized he had to escape.::Christine은 Mike가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메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해 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 이야기를 Mike의 메모와 함께 SNS에 올렸다. 이 슬픈 소식은 소셜미디어에서 한동안 회자되다가 한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프로그램 진행자의 손에 들어갔다. 몇 차례 시도한 끝에 그 라디오 쇼 진행자는 마침내 Mike를 찾아냈고 그의 생존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태풍이 닥친 날, Mike는 TV로 뉴스를 보다가 밖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는 큰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문쪽으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집 바깥의 거리에 물이 높았고 빠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물은 곧 현관문 높이까지 차오르더니 집을 메우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Mike는 물에 휩쓸려 부엌까지 밀려갔다. 집 전체가 곧 물에 잠길 것 같았다. 그는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시박 4-3::As he emerged from his house, the current caught him and carried him out to sea. He tried to swim back to an unflooded house, but the current was too strong and the waves took him out to sea again and again. After hours of fighting against the water, he was finally able to find his way to Christine's house. Shivering with cold, Mike wrapped his body in the blankets that were on the chair. He was thirsty because he had swallowed so much salt water. He could find nothing to drink. Mike picked up the phone to call his family, but it did not work. The water was now flowing quickly into Christine's house. He was now too weak to swim, having already swum several hours to find his way back to land after being washed out to sea. Sensing the end was near, Mike wrote the note that Christine found. Finishing the note, Mike almost gave up on his life, when he saw through the window a boat approaching. Help!, he shouted with all his remaining strength. The man on the boat heard the voice and finally Mike was rescued. He took Mike home and gave him food and warm clothes. Survival stories like Mike's make people appreciate what they have when they are safe and sound at home with their family, leading their daily lives.::그가 집 밖으로 나오자 거센 조류가 덮치더니 그를 바다로 휩쓸어갔다. 그는 물에 잠기지 않은 집으로 헤엄쳐 가려고 애썼지만 조류가 너무 강했고 파도가 그를 계속해서 바다로 쓸어 갔다. 몇 시간 동안 물과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그는 Christine의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추위에 떨던 Mike는 의자에 놓인 담요로 몸을 감쌌다. 그는 짠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목이 말랐다. 마실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Mike는 가족에게 전화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지만 고장이었다. 물이 이제 Christine의 집으로 빠르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물결에 쓸려 바다로 떠내려 간 뒤 다시 육지로 헤엄쳐 오느라 수 시간을 보냈기에 그는 이제 너무 힘이 없어서 수영을 할 수 없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하고 Mike는 Christine이 발견한 메모를 쓴 것이었다. 메모를 남긴 뒤 Mike가 거의 목숨을 포기했을 때 창밖에서 보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도와주세요! Mike는 남은 힘을 다하여 외쳤다. 보트를 탄 사람은 Mike의 목소리를 들었고 마침내 그는 구조되었다. 그는 Mike를 집으로 데려가 음식과 따뜻한 옷을 주었다. Mike의 이야기와 같은 생존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며 가족과 함께 집에서 안전하고 건강할 때 그들이 누리는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한다.
영시박 4-4::How Do Hurricanes Form? Hurricanes form only over ocean water that has a temperature of 26 or more degrees Celsius. This is why they are common in the tropics where water temperatures are high all year round. When warm air rises, creating low pressure over the water surface, cooler air from nearby enters to fill the area. As this process continues, the resulting clouds begin to expand, giving rise to rains and thunderstorms. The thunderstorms then begin to move in circles around a central point, due to the rotation of Earth. This point is called a tropical depression. As the tropical depression moves over warmer waters, the clouds expand and the winds begin to build up speed, becoming a "tropical storm." As the storm grows, the wind increases, achieving speeds of as much as 118 kilometers per hour. At this point the storm officially becomes a hurricane. It is now a huge storm that can be seen from space. Interestingly enough, the storm has a calm center, which is called the "eye."::태풍은 어떻게 형성되나? 태풍은 수온이 섭씨 26도 이상 되는 바닷물 위에서만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연중 수온이 높은 열대 지역에서 태풍이 흔한 이유이다.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 수면에 저기압을 형성하면, 주위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밀려든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그로 인해 발생한 구름이 점점 커지고, 그 결과 비와 뇌우가 발생한다. 그 후 뇌우는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한 중심점 주위를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지점을 열대성 저기압이라고 부른다. 열대성 저기압이 더 따스한 물 위를 이동하면서 구름이 확장되고 바람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면 '열대성 폭풍'이 된다. 이 폭풍이 커지고 바람이 증가하여 시속 118킬로미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이 폭풍은 공식적으로 태풍이 된다. 이제 이것은 우주에서도 관측되는 거대한 폭풍이다. 아주 흥미롭게도 폭풍의 중심은 평온한데, 이 지점을 '눈'이라 부른다.
영시박 5-1::Artists work magic with visual images. Their colors and shapes can fool us. Sometimes, their works confuse us with their extreme reality. At other times, artists turn ordinary images into something strange and make us wonder about them. Artists are also able to paint images from our dreams on their canvases. With their magic, artists can fascinate us and take us away from our everyday lives.::화가들은 시각적 이미지로 마술을 부린다. 그들의 색채와 형태는 우리를 속일 수 있다. 가끔 그들의 작품이 가진 극도의 현실성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때는, 화가들이 평범한 이미지를 이상한 것으로 바꾸어 우리로 하여금 놀라워하고 궁금해 하게 할 수도 있다. 화가들은 또한 우리 꿈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화폭에 그릴 수도 있다. 화가는 마술을 부려 우리를 매혹하고 일상으로부터 먼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
영시박 5-2::Imitating Reality. In the past, the main goal of many painters was to imitate reality. One popular story from ancient Greece tells of two famous painters. They wanted to prove their skills in a competition. One of them painted grapes that looked so real that birds actually tried to eat them. The other artist, however, won the competition, when his picture of a curtain fooled not animals, but his competitor, who tried to pull the painted curtain aside to see the picture behind it. This kind of realistic art was popular during the ancient Greek and Roman times and then again during the Renaissance. Its purpose was to capture a moment in time and hold it forever. In this picture, a boy seems to be emerging from the dark space of the picture. He has one foot on the frame, seemingly trying to pull himself out of the scene. To these artists, what mattered most was the vividness of the moment.::현실 모방하기. 과거에는 많은 화가들의 주된 목표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한 민담은 유명한 두 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시합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한 화가는 포도를 그렸는데 너무 진짜 같아서 새들이 실제로 와서 먹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화가가 시합에서 이겼다. 그때 그가 그린 커튼은 동물들이 아닌 경쟁자의 눈을 속여 경쟁자가 그림 커튼을 걷고 그 뒤에 있는 그림을 보려 했던 것이다. 이런 부류의 리얼리즘 예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기가 있었고, 그 후로 다시 르네상스에 인기를 얻었다. 그 목적은 시간 속의 한 순간을 포착해 영원히 붙잡으려는 것이었다. 이 그림에서는 한 소년이 어두운 그림의 공간에서 빠져나 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한쪽 발을 액자에 올려놓고, 그 풍경에서 몸을 빼내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이런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 순간의 생생함이었다.
영시박 5-3::Telling Stories. Some artists used illusions to tell a story. Sometimes, they hid messages in their pictures so well that we might miss them even when they are right before our eyes. Here is a picture of two men. Between them are many ordinary objects that look so real that even the smallest detail can be detected. If you look at the picture closely, however, you will see a strange form at the bottom center. Can you tell what it is? It is, in fact, a secret message that the artist hid in the picture. He distorted the shape of a common object to make it harder to recognize. It can be identified only when it is viewed from a specific angle. To catch the message, look for the arrow on the right of the picture. Then, view the picture from that angle with your nose directly against the paper, and the secret message will appear. It is a skull, spread out! The skull was a reminder of death, a common theme in Renaissance art. It stands for the short, meaningless nature of life, and the artist must have painted the skull to remind us that we will, one day, die. The artist, however, may not have wanted to frighten the viewers with too direct an image and hid the message. The painting probably hung on a wall right beside the stairs, so that the viewers, while coming down, could see the skull in its original shape.::이야기 들려주기. 어떤 화가들은 착시를 이용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끔은 그림 속에 메시지를 너무나 잘 숨겨 두어 우리가 눈앞에 두고도 그 메시지를 못 보기도 한다. 여기에 두 남자의 그림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진짜처럼 보여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일상적인 물건들이 많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래쪽 중간에서 이상한 형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사실 그것은 화가가 그림 속에 숨겨 놓은 비밀의 메시지다. 화가는 평범한 사물의 형태를 왜곡해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특정한 각도에서 봐야만 정체를 알 수 있다. 메시지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림 오른편의 화살표를 찾아보라. 그리고 코를 종이에 딱 붙이고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림을 보라. 그러면 비밀의 메시지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쫙 펼쳐진 해골이다! 해골은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르네상스 예술에서 흔한 주제였다. 해골은 인생의 짧고 무의미 한 본질을 상징하는데, 화가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 해골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는 너무 직설적인 이미지로 보는 사람들을 겁주고 싶지는 않아서 메시지를 감췄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아마도 계단 바로 옆의 벽에 걸려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그림을 보는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원래의 형태대로 해골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영시박 5-4::Painting the Landscape of Dreams. René Magritte, a Belgian painter, understood one thing better than anyone else–that common, everyday objects can be painted in surprising ways. His paintings represent objects in great detail, but at the same time they differ from how we see reality. For example, look at the lady in the picture. Where is she riding? Is she in front, behind, or among the trees? The image feels real, but we cannot explain exactly what we see, just as if it were a dream. Magritte belonged to an art movement called Surrealism. Surrealist painters tried to capture the workings of the human unconscious through fantastic images. We can think of art as a history of illusions. Looking at the world through art, we come to appreciate it from unexpected, surprising, and fresh perspectives.::꿈의 풍경 그리기. 벨기에 화가 René Magritte(르네 마그리트)는 다른 누구보다 한 가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들도 놀라운 방식으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그림들은 사물을 굉장히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우 리가 현실을 보는 방식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이 그림 속의 숙녀를 보라. 어디에서 말을 타고 있는가? 나무들 앞에서, 뒤에서, 아니면 사이에서? 이미지는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정확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지 설명할 수가 없다. Magritte는 초현실주의라 불리는 예술 사조에 속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무의식의 작용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미술을 착시의 역사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뜻밖의 놀랍고 신선한 시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영시박 6-1::Yena's Two Weeks in Peru Last summer I learned about the Inca Project in Peru while I was researching how I could spend my summer vacation in a meaningful way. The goal of the project is to preserve an Inca archaeological site in Peru. I decided to participate in the project since it would give me an opportunity to both travel and take part in a real archaeological dig. Even though I was excited about the project, I was also nervous because I had never before traveled alone to such a distant place. The site of the dig was near Cusco, a city that was once the capital of the Inca empire, high in the Andes mountains. Traveling to Cusco was not easy. I had to change flights twice, once in Los Angeles, California, and again in Lima, Peru, before finally arriving in Cusco, 32 hours after I left Korea. In Cusco, the local staff welcomed me with a warm "Buenos dias, Yena." The director introduced me to the other international volunteers who arrived at the same time. They came from many different countries including England, Canada, America, and Belgium.::예나의 페루에서의 2주 지난 여름에 나는 여름 방학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조사하던 중 페루의 잉카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의 목표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고학 발굴 장소를 보존하는 것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여행도 하고 실제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둘 다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내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내가 그처럼 먼 장소로 혼자 여행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불안했다. 발굴 장소는 쿠스코 근처였는데, 이는 안데스 산맥 고원에 위치한, 한때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다. 쿠스코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한국을 떠난 지 32시간 후 마침내 쿠스코에 도착하기 전에 두 번이나, 즉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번, 그리고 페루의 리마에서 한 번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쿠스코에서, 현지 직원이 내게 "안녕하세요, 예나씨"하며 따뜻한 인사로 맞아 주었다. 소장님은 같은 시간에 도착한 다른 국제 봉사단원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영국, 캐나다, 미국, 벨기에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왔다.
영시박 6-2::Cusco is a beautiful city with old constructions. We stayed in Cusco for two days, recovering from the long hours of flight and adjusting to the high mountain area. We took advantage of the time to tour the city and to see something of the surrounding area. On the first day, we visited Sacsayhuaman, a huge Inca stone construction. The construction includes a great square with three big walls. I was amazed that the huge stones for these walls were placed very tightly together. The next day, we went to Pisac, a historic site located on a mountain slope of the Sacred Valley. On our way to the site, there was a town where the main square and market were crowded with local people. At the market, I bought a cute doll from a woman who had made it herself. For dinner that evening we had ceviche, a dish of fish soaked in lime juice. This sweet and sour local food was served with sweet potatoes and corn. I had not eaten any Peruvian food before. All the dishes that we ordered were delicious.::쿠스코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우리는 장시간의 비행으로부터 회복하고 고산 지역에 적응하며 쿠스코에 이틀간 머물렀다. 우리는 그 도시를 관광하고 주변 지역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첫째 날, 우리는 거대한 잉카 석조 건축물인 삭사이우아만을 방문했다. 그 건축물은 세 개의 큰 벽들로 이루어진 큰 광장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이 벽들을 이루는 거대한 돌들이 매우 촘촘하게 배치된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신성한 계곡의 산악 경사면에 위치한 역사적 장소인 피삭에 갔다. 이 장소로 가는 길에 지역 사람들로 붐비는 주 광장과 시장이 있는 마을이 있었다. 시장에서 나는 한 여자로부터 그녀가 직접 만든 예쁜 인형을 하나 구입했다. 그날 저녁 식사로 우리는 라임 주스에 절인 생선 요리인 세비체를 먹었다. 이 새콤달콤한 지역 음식은 고구마와 옥수수와 함께 나왔다. 나는 이전에 페루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주문한 모든 음식들은 맛있었다.
영시박 6-3::After seeing Cusco, we moved to Huyro, the site where we would be working. My heart beat at the beautiful surroundings. I was excited about the work I would be doing. All the staff and other volunteers who had arrived in Huyro earlier welcomed us with warm hearts. The next morning we began working at the site. To arrive at the site, we had to walk up a mountain for thirty minutes. I imagined that we were in an Indiana Jones movie, making a path through the forest to find evidence of the ancient Inca civilization. At the archaeological site, we pulled out weeds and cut down trees that had grown to cover the site. Then, while digging at the site, we found some pieces of ancient pottery. The head archaeologist, a Peruvian, discovered a large pottery piece. He said it might have been the side of a pot that was used to store beans. By early afternoon, working in the heat and the thin air, I was exhausted. After days of hard work, however, I was pleased that I had been part of such a worthy project as preserving the remains of the ancient Inca civilization.::쿠스코를 관광한 후 우리는 작업할 장소인 후이로로 이동했다. 아름다운 주위 풍경에 내 가슴이 뛰었다. 나는 내가 할 일에 대해 들떴다. 후이로에 먼저 도착한 모든 직원들과 다른 봉사 단원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는 발굴 장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발굴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30분 동안 산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는 마치 우리가 인디애나 존스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고대 잉카 문명의 증거를 찾기 위해 숲속을 통과하며 길을 만든다는 상상을 했다. 고고학 발굴 장소에서, 우리는 잡초들을 제거하고 발굴 장소를 덮을 정도로 자란 나무들을 잘라 내었다. 그 후, 발굴 장소에서 땅을 파다가 우리는 몇 점의 고대 도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다. 페루인인 수석 고고학자는 큰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그 조각이 콩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던 항아리의 측면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 오후 시간이 되자 열기와 산소가 부족한 공기 속에서 일한 탓에 나는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힘든 일을 한 후에 내가 고대 잉카 문명의 유물들을 보존하는 값진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다는 점에 대해 기뻤다.
영시박 6-4::Besides our archaeology work, we visited a local elementary school once a week. We taught and played with the children in the morning and we read to the children from books in the library in the afternoon. Although they didn't have much, the children were happy and thankful for what they had. That moved me deeply. Near the end of our visit, having completed our volunteer work, we went by train to the nearby ruins of Machu Picchu. The ancient sky city welcomed us with its grand view of the Urubamba Valley far below. We could not imagine how the Inca could have built such a large city on top of a high mountain. We were amazed by the outstanding building skills of the Inca civilization, which prospere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After my unforgettable days in Peru, I returned to my daily life at home. The happy moments I spent there went by so fast. I wished I could have stayed longer. Participation in the Inca Project was a blessing to me, allowing me to learn the importance of volunteering. I received far more than I gave from the experience.::고고학적 작업 이외에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지역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우리는 아침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놀아 주었으며, 오후에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다. 비록 아이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자신들이 가진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것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우리의 방문이 끝날 무렵, 우리의 봉사 활동을 마무리한 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근처의 마추픽추의 유적으로 갔다. 그 고대 하늘 도시는 저 멀리 아래에 보이는 우루밤바 계곡의 장관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잉카인들이 높은 산 정상에 어떻게 그토록 큰 도시를 건설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5세기도 더 전에 번성했던 잉카 문명의 뛰어난 건축 기술에 감탄했다. 페루에서의 잊지 못할 날들을 보낸 후에, 나는 고국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보낸 행복한 순간들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잉카 프로젝트 참여는 내게 봉사 활동의 중요성을 알게 해 준 축복이었다. 나는 이 경험으로부터 내가 베푼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다.
영시박 6-5::For the past three years, Ethan has been schooling us all in the game of life. He always reminds us that everyone is important to a team's success, though their role on the team may be small. Instead of putting all his efforts into trying to be the team's best player, he has done everything he can to make the team better. As Ethan has shown us, lifting up those around us is also of great worth. When we help others shine, their light will shine on us in return. Yes, sometimes there is something better than being the best.::지난 3년간, Ethan은 삶이라는 경기에서 우리 모두를 가르쳐왔다. 그는 팀에서의 역할이 작을지라도 모두가 팀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일깨워준다. 팀의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대신에, Ethan은 팀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 Ethan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 역시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도와주었을 때, 그 빛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를 비출 것이 다. 그렇다, 때로 최고가 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영시박 7-1::From Observation to Creation Lion Lights Richard Turere was an eleven-year-old boy in Kenya when one morning, upon entering the stable, he found that one of his family cows had been killed. Lion attack! Not just Richard's family, but many of their neighbors were putting up with the same problem. Some people who had lost animals to the lions wanted to kill the lions to protect their remaining cows and goats. That, however, would have brought another problem, for lions are the top tourist attraction in Kenya and are protected by law. In addition, their numbers are decreasing. Members of Richard's family took turns guarding the cows in their stable at night. Still, when everyone was asleep, lions were able to get through the fence. Richard first set up a series of torches on the fence. He knew lions were afraid of fire. What he did not know was how smart lions are. When the lions found out that no one was around, they entered the stable and attacked the cows anyway. Next, Richard set up scarecrows. They were of no use, either. He had to find a way to stop the lions before he lost another cow!::관찰에서 창조로 사자 등불 Richard Turere(리처드 투레레)는 케냐에 사는 열한 살 소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축사에 들어갔을 때 Richard는 암소 한 마리가 죽은 것을 발견했다. 사자의 습격이구나! Richard의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이웃도 같은 문제로 받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사자에게 가축을 잃은 사람들 일부는 남아 있는 암소와 염소를 지키기 위해 사자를 죽이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자 사냥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자는 관광객이 케냐를 찾는 가장 큰 이유이고 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자 숫자가 감소하고 있기도 했다. Richard의 가족은 밤에 순번을 정해 축사에서 암소를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잠든 밤이면 사자가 담장을 넘어 습격해 왔다. 처음에 Richard는 담장에 횃불을 여러 개 매달아 보았다. 사자는 불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사자가 얼마나 영리한지는 알지 못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사자들은 축사에 들어와 암소를 공 격했다. 다음으로 Richard는 허수아비를 세워보았다. 역시 소용없었다. 또 한 마리의 암소를 잃기 전에 사자를 막을 방법 을 찾아야 했다.
영시박 7-2::Richard observed the lions' behavior. One night, he took a torch and walked around the stable. He sensed that lions were outside in the dark, but they would not come near if they thought somebody was walking around to protect the cows. Then he had an idea— a moving torch! To lions, a moving torch could only mean that a person was holding it, which would stop them from approaching the stable. How, he thought to himself, could he make it appear that a torch was moving? After lots of trial and error, Richard finally created a system of flashing LED lights, powered by an old car battery that was charged by a solar panel. Richard set the lights up along the fence. At night, the lights could be seen from outside the stable and took turns flashing, which appeared as if people were moving around with torches. Never again did lions cross Richard's fence. Richard called his system Lion Lights. This simple and practical device did no harm to lions, so human beings, cattle, and lions were finally able to make peace with one another. Lion Lights also work for other wild animals. Richard's Lion Lights are now being used all over Kenya.::Richard는 사자의 행동을 관찰했다. 어느 날 밤 Richard는 횃불을 들고 축사 주위를 걷고 있었다. 사자들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를 지키기 위해 사람이 횃불을 들고 걸어 다니는 동안에는 다가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움직이는 횃불! 사자에게 움직이는 횃불은 사람이 들고 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자가 축사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Richard는 생각했다. 횃불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Richard는 마침내 깜빡이는 LED 전구로 된 장치를 만들었다. 이 전구는 태양 전지로 충전되는 낡은 자동차 배터리에서 나오는 전기로 켜졌다. Richard는 담장을 따라 전구를 설치했다. 밤이 되자 축사 밖에서 전구 불빛 이 보였다. 차례대로 깜빡이는 불빛은 마치 사람이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Richard네 담장을 넘는 사자는 없었다. Richard는 이 장치를 사자 등불이라고 불렀다. 이 간단하고 실용적인 장치는 사자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과 사자가 마침내 평화롭게 지낼 수 있 게 되었다. 사자 등불은 다른 야생 동물에게도 효과가 있다. Richard의 사자 등불은 현재 케냐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영시박 7-3::Sensor Socks Kenneth Shinozuka was a child when a police officer brought his grandfather home. The old man had been found wandering aimlessly on the street. He did not remember when and how he had gotten there. It turned out that he had Alzheimer's, a brain disease that slowly takes away a patient's memory and ability to think. Going to middle school, Kenneth often looked after his grandfather. When his grandfather got up and started to wander, Kenneth followed him to protect him from danger. Following his grandfather, he wondered whether he could do anything more to help him. His grandfather was safe when he stayed in his room. The problem was that there was no way of knowing where his grandfather would go when he left the safety of his room. That required that someone stay with him all the time. One night, a spark of hope crossed Kenneth's mind. When Kenneth watched as his grandfather got up and stepped down onto the floor as usual, an idea struck him. To walk, a person must first step down on their feet. If a patient's steps make loud noises, as if walking in wooden shoes, it will wake up the caregiver. But it will also wake up others who are sleeping nearby. "No, it's not practical," Kenneth thought. Was it possible to send some kind of signal only to the person you wanted to wake up? There must be some sensors for this purpose. How could the signals be received? Kenneth's thinking started to speed up.::센서 양말 Kenneth Shinozuka(케네스 시노즈카)가 어렸을 때 경찰이 Kenneth의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온 적이 있었다. 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할아버지를 경찰이 발견했는데, 할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거기 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알츠하이머는 환자의 기억과 사고력을 서서히 빼앗아 가는 뇌질환이다. 중학교에 다니며 Kenneth는 종종 할아버지를 돌보았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회하기 시작하면 Kenneth는 할아버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따라다녔다.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Kenneth는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할아버지는 방에 머무는 동안은 안전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언제 안전한 방에서 나가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 항상 할아버지 곁에 있어야 했다. 어느 날 밤 희망의 불꽃이 Kenneth의 뇌리를 스쳐갔다. 할아버지가 평소처럼 일어나 방바닥을 딛는 것을 보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걸으려면 발로 디뎌야 한다. 만일 걸을 때 나막신을 신은 것처럼 큰 소리가 난다면 돌보는 사람을 깨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가까이에서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깨울 것이다. "아니야, 그것은 실용적이지 못 해," Kenneth는 생각했다. 깨우고 싶은 사람에게만 모종의 신호를 보낼 수는 없을까? 이런 용도의 센서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신호는 어떻게 받을까? Kenneth의 생각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영시박 7-4::He finally came up with a system of socks with sensors in the heels and a smartphone working as a monitor. The sensors had to be thin enough to be comfortable on the bottom of a foot. After tries with several different materials, he ended up with a film sensor operating with a small battery. Next, he studied programming to code an app that would transform a smartphone into a monitor. The system Kenneth eventually created worked as it was supposed to. When his grandfather started to walk, the sensors sent signals to the paired smartphone, raising an alarm. And then the smartphone worked as a monitor that showed his grandfather's movements. Kenneth's sensor socks were recognized at a science fair. He planned to improve the device and hand it out to Alzheimer's patients as needed. Richard and Kenneth tried to draw creative ideas from observation and turn them into reality. Richard's careful observation of lions' behavior eventually brought peace to his village. Kenneth's observation of his grandfather's wandering led to the creation of a device that helps people with Alzheimer's. If you observe your surroundings with fresh eyes, something great can happen. Try it. Who knows what might come of it?::Kenneth가 마침내 생각해 낸 것은 발꿈치에 센서가 붙은 양말과 모니터로 사용되는 스마트폰을 결합한 장치였다. 센서는 발꿈치에 닿아도 편안할 만큼 얇아야 했다. 여러 다른 재료들로 시험한 끝에 Kenneth는 작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필름 센 서를 사용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그는 스마트폰을 모니터로 변신시켜 주는 앱을 코딩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 했다. Kenneth가 드디어 만든 장치는 의도대로 작동했다. 할아버지가 걷기 시작하자 연결된 스마트폰에 센서가 신호를 보내어 알람이 울리게 했다. 그러자 스마트폰은 모니터로 작동하여 할아버지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Kenneth의 센서 양말은 과학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Kenneth는 이 장치를 개선하여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나누어 줄 계획을 세웠다. Richard와 Kenneth는 관찰을 통해 창의적인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했다. Richard는 사자의 행동을 세심히 관찰하여 결과적으로 마을에 평화를 가져왔다. Kenneth는 할아버지가 배회하는 것을 관찰하여 알츠하이머 환자를 돕는 장치를 개발했다. 우리도 주위를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면 무엇인가 멋진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시도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영시박 8-1::A Sustainable Wayof Life Host: Welcome to the "Morning Show." Today, we have Mr. Doug Fine here to talk about a sustainable way of life. Born and raised in New York, Mr. Fine bought a farm in the New Mexico desert and moved there. He wanted to see if he could live with the least consumption of fossil fuel energy. Let's learn about his struggles to reduce his carbon emissions. Hello, Mr. Fine. Would you please introduce yourself to our audience? Mr. Fine: Yes. Hi, everyone. It's great to be here. My name is Doug Fine, and I am a journalist. I'm trying to stop using fossil fuels and live as green a life as possible. Host: You said you are trying to quit using fossil fuels. Why? What's wrong with fossil fuels? Mr. Fine: Well, we all know the story, don't we? We get energy mainly from burning fossil fuels, but there are a couple of problems with that. Fossil fuels are not renewable, which means that sooner or later we are going to run out of them. Also, they harm the environment. When you burn fossil fuels, carbon gas is produced, which has a harmful effect on the climate.::지속 가능한 생활방식 진행자: '모닝쇼'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이곳에 Doug Fine 씨를 모시고 지속 가능한 생활방식에 대해 이야기 를 나눠 보겠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Fine씨는 뉴멕시코의 사막에 농장을 사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셨습니 다. 화석 연료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소비하면서 살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으셨다는데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Fine 씨의 고군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안녕하세요, Fine 씨. 우리 시청자들에게 자기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Fine 씨: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기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제이름은 Doug Fine이고 기자입니다. 화석 연료 사용을 끊고 최대한 친환경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화석 연료 사용을 끊으려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째서요? 화석 연료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Fine 씨: 뭐,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로 화석 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얻지만 거기에는 한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화석 연료는 재생이 불가능한데, 그 말은 조만간 고갈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화석 연료는 환경을 해칩니다. 화석 연료를 태우면 탄소 가스가 생성되는데, 이것이 기후에 해로운 영향을 끼칩니다.
영시박 8-2::Host: Climate change is not news, but we are likely to think it's none of our business. Mr. Fine: I hadn't taken it seriously before either. While working on a documentary in Alaska, however, I realized that climate change is serious and that I, along with everyone else, am responsible for it. I could see it with my own eyes. Enormous ice sheets were melting away. It struck me hard that I was sending carbon into the air whenever I turned on the lights, drove a car, or even went shopping for food. I felt I had to do something. Host: So you decided to change your way of life. What exactly did you do? Mr. Fine: To begin with, I gave up city life. Do you know what the two things in our lives that burn the most fossil fuels are? Electricity and transportation. But who could live entirely without them? We certainly cannot. If it were not for electricity and transportation, we would have to live like primitive people. So I wanted to set up a more sustainable system of providing for them, different from the current one that is so dependent upon fossil fuel energy. It was difficult for me to do this in a city as big as New York. Host: In other words, you wanted to enjoy all the benefits of the modern age, only with a lot less fossil fuels.::진행자: 기후 변화는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Fine 씨: 저 역시 예전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래스카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기후 변화가 심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눈으로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빙하가 녹아 없어지고 있었어요. 내가 전깃불을 켜고 차를 몰고 심지어 먹거리를 쇼핑할 때도 탄소를 공기 중에 배출한다는 걸 절실하게 실감했습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진행자: 그래서 생활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하셨군요. 정확히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Fine 씨: 일단, 도시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화석 연료를 가장 많이 태우는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기와 수송 수단입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를 완전히 빼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 그럴 수가 없지요. 전기와 수송 수단이 없다면 원시인처럼 살아야 할 거예요. 그래서 화석 연료 에너지에 너무 의존하는 현재의 체제와 다르게 두 가지를 해결하는 좀 더 지속 가능한 체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뉴욕처럼 큰 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진행자: 달리 말해서, 현대의 모든 혜택은 즐기되, 화석 연료 사용만 대폭 줄이기를 원하셨군요.
영시박 8-3::Mr. Fine: Exactly. As for electricity, my answer was solar energy. It's also the reason I chose New Mexico. The sun shines almost all year round there. Still, it was not easy for me to get electricity from sunlight. Solar panels are surprisingly expensive, and I had trouble putting them in place. It was worth the effort, though. Now a large part of the electricity used on my farm is provided by my DIY solar system. After going solar, my farm uses only one tenth of the fossil fuel energy used by the average American household. Host: And regarding transportation, I hear you now drive a very special truck. Mr. Fine: Yes. I came up with what I consider a brilliant idea – biofuel. I bought a diesel truck and had it converted to run on vegetable oil. Rudolf Diesel, the inventor of diesel engines, actually intended for farmers to grow their own fuel. These days, I no longer go to a gas station to get fuel. I pay regular visits to a local Chinese restaurant and collect waste cooking oil. It does not cost money and does not send carbon into air. The only problem is that the truck smells like fried chicken, and driving it makes me terribly hungry!::Fine 씨: 바로 그겁니다. 전기에 관한 한, 제 해답은 태양광 에너지였습니다. 제가 뉴멕시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는 태양이 거의 일 년 내내 내리쬐니까요. 그렇지만 저로서는 햇빛으로부터 전기를 얻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태양광 패널은 놀랄만큼 비싸고, 설치하는 데도 애를 먹었죠. 그렇지만 노력한 만큼 가치는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 농장의 전력 사용량의 상당 부분을 직접 설치한 태양광 시스템으로 보급합니다. 태양광으로 바꾸고 나서 제 농장은 평범한 미국 가정이 쓰는 화석 연료 에너지의 1/10밖에 쓰지 않아요. 진행자: 그리고 수송 수단에 관해서는, 듣기로 지금 아주 특별한 트럭을 몰고 계시다고요. Fine 씨: 네. 제가 생각하기에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거든요. 바이오 연료입니다. 디젤 트럭을 한 대 사서 식물성 기름으로 달릴 수 있게 개조했습니다. 디젤엔진의 발명가인 Rudolf Diesel은 애초에 농부들이 스스로 연료를 경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어요. 요즘은 연료를 넣으러 주유소에 가지 않습니다. 동네 중국 음식점에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폐식용유를 모아와요. 돈이 들지도 않고 공기 중에 탄소를 배출하지도 않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트럭에서 프라이드 치킨 냄새가 나서 운전할 때마다 배가 고파 미치겠다는 것뿐이지요!
영시박 8-4::Host: You also started farming. What does food have to do with carbon reduction? Mr. Fine: I'm not a farmer by trade. I just try my best to grow what I eat. Eating locally is another way of reducing carbon emissions. Not only people but also food travels in this world of global trade. The tomatoes in your lunch salad may have come from Chile. To bring them to you consumed a lot of jet fuel. I grow fruits and vegetables and raise some chickens for daily eggs, just for my dinner table. I also raise goats for milk and ice cream. Without ice cream, my happiness couldn't be complete! Host: Are you satisfied with your life? Do you think a more sustainable way of life is possible for everyone? Mr. Fine: When I started this, I set three goals for myself. "Use less oil. Power my life with solar energy, and eat locally." It's been only a year, but I believe I've made significant progress. If we stay aware and keep trying, I'm certain that we can build a better future. Not everyone can do what I did, but everyone can, and should, try to reduce their carbon consumption. Host: Mr. Fine, thank you very much for joining us. Mr. Fine: My pleasure. Thank you for having me.::진행자: 농업도 시작하셨지요. 음식과 탄소 배출량 감소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Fine 씨: 저는 생업이 농부는 아닙니다. 그저 먹을 만큼만 재배하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지역생산물을 먹는 것은 탄소 배출을 줄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오늘날 세계 무역의 세상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먹거리도 여행을 하거든요. 점심 샐러드에 든 토마토는 칠레에서 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 토마토를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제트 연료가 많이 소모됩니다. 저는 그냥 제 저녁 식탁을 위해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고 날마다 먹을 계란을 낳아 줄 닭을 몇 마리 키웁니다.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위해 염소도 키우고요. 아이스크림이 없다면 제 행복은 완전해질 수 없을 거예요! 진행자: 지금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좀 더 지속 가능한 생활방식이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Fine 씨: 이 일을 시작할 때 혼자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기름을 덜 쓸 것, 태양광 에너지로 전기를 공급해서 생활할 것, 그리고 지역 먹거리를 먹을 것.' 겨우 일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믿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계속 노력한다면,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모두가 제가 했던 것 처럼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탄소 소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진행자: Fine 씨, 오늘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Fine 씨: 천만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시박 9-1::Sports and Technology Go Hand in Hand Every athlete tries to run faster, jump higher, or become stronger. Since the late twentieth century, athletes have been actively taking advantage of the progress in science and technology to achieve their goals. Now technology is taking sports to another level. Technology affects how players are trained, how rules are enforced, how audiences enjoy the games, and how the public exercises. At the start of the 2014-2015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NBA) season, the Golden State Warriors were not viewed as an elite team. They won their last championship 40 years ago. Then something happened―they began to win, game after game. Their defense improved, their offense improved, and, most of all, fewer players suffered from injuries. Everybody wondered: What had happened to them? It was a new training suit that changed the team. It was not just an ordinary suit, of course. The new suit was a smart suit that was connected to a mobile app.::스포츠와 기술이 손을 잡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더 빨리 달리고, 더 높이 뛰며,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운동선수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제 기술은 스포츠를 한 단계 높이고 있다. 기술은 선수들이 훈련하는 방식, 경기 규칙을 준수하는 방식, 관중이 경기를 즐기는 방식, 그리고 대중이 운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4-2015 미국 프로 농구(NBA)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강팀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은 40년 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경기마다 이기기 시작했다. 수비가 개선되었고 공격이 개선되었고, 무엇보다 부상을 입는 선수가 줄었다. 모두가 궁금해 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팀을 바꾼 것은 바로 새로운 운동복이었다. 물론 보통 운동복은 아니었다. 새 운동복은 휴대폰 앱과 연동된 스마트 운동복이었다.
영시박 9-2::The suit comes in three parts: the top, the pants, and a plastic core. The top and the pants have several sets of sensors for each of the major muscle groups. Inside the top and the pants, there is a pocket that holds the core. The core reads all the data from the sensors and sends it to a smartphone app. The app lets coaches see in real time which muscle groups are being used during practice. After practice, the athlete can also review his performance. The use of smart clothes greatly helped the Warriors' coaches improve their training program. "I like especially that I can see the players' exhaustion before injury occurs," one of the coaches said. The Warriors continued to win during the 2014-2015 season and went on to win the NBA championship. Technology is also helping to settle possible disputes over referees' calls during games. This trend was promoted when FIFA, the world's largest soccer association, decided to adopt goal-line technology for the 2014 World Cup. Traditionally, FIFA allowed the referees absolute power on the administration of the game. Any errors by the referees were viewed as part of the game. When a referee's call was disputed, both players and audiences often brought complaints about this policy. When the disputed call was about a goal, the complaints sometimes became violent.::이 운동복은 상의, 바지, 플라스틱 코어 등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의와 바지에는 각각의 주요 근육군을 담당하는 여러 개의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 상의와 바지 안쪽에는 플라스틱 코어를 넣는 주머니가 달려 있다. 이 코어는 센서로부터 모든 데이터를 읽어 들여 스마트폰에 설치된 앱으로 전송한다. 이 앱을 통해 코치는 연습 중 어떤 근육군이 사용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연습이 끝나면 운동선수는 자신의 운동 성과를 검토할 수 있다. 스마트 운동복을 사용함으로써 워리어스의 코치들은 훈련 프로그램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부상이 발생하기 전에 선수들의 피로도를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코치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워리어스는 2014-2015 시즌 내내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NBA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기술은 또한 경기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논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추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 협회인 국제축구연맹(FIFA)이 2014년 월드컵에 골라인 판독 기술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촉진되었다. 전통적으로 국제축구연맹은 경기 운영에 관해 심판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심판의 실수는 경기의 일부로 간주되 었다. 심판의 판정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 선수들과 관중들은 종종 이 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논란이 되는 판정이 골에 관한 것이면 이 불만은 때로는 과격해지기도 했다.
영시박 9-3::It was goal-line technology that settled any disputes over goals. A system using this technology employs as many as 14 cameras that capture a ball from various angles, showing exactly where the ball is at a certain time. The moment a ball passes the goal line, signals are sent to a watch worn by the referee. The adoption of goal-line technology forever ruled out the possibility of disputes over goals. In addition to the improvement of players' training and referees' calls, technology is helping sports fans enjoy games at another level. Virtual reality is one of the most promising technologies in this area. In the fall of 2015, a group of soccer fans in Portugal had a chance to watch a virtual reality game between their favorite teams. They sat in a movie theater, but felt as if they were part of the game, thanks to the virtual reality gear they wore. Several 360-degree cameras installed on the field sent videos from various angles to a broadcasting station. The station created virtual reality screens out of the videos and then sent them to the gear the fans were wearing. The fans were even able to change perspectives, choosing to be either part of the audience, part of a team, or be on the field itself. It was as if they were actually in the game.::골에 관한 모든 분쟁을 종결시킨 것은 바로 골라인 판독 기술이었다. 이 기술을 사용한 시스템은 14개나 되는 카메라를 사용하여 공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서 특정 시점의 공의 위치를 정확히 보여준다. 공이 골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심판이 착용한 시계에 신호가 간다. 골라인 판독 기술의 채택은 골에 관한 분쟁의 가능성을 영원히 배제하였다. 선수들의 훈련과 심판의 판정을 개선한 것 이외에도 기술은 스포츠 팬들이 경기를 즐기는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도움 을 주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가상 현실 기술이 가장 유망한 기술 중 하나이다. 2015년 가을 포르투갈에서는 한 무리의 축구 팬들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가상 현실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극장에 앉아 있지만 착용하고 있던 가상 현실 장치 덕분에 경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기장에 설치된 여러 대의 360도 촬영 카메라가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방송국에 보냈다. 방송국은 그 영상으로 가상 현실 화면을 만들어 팬들이 착용한 장치로 보냈다. 팬들은 관점을 바꾸어 관중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팀의 일원이 될 수도 있고, 경기장 안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영시박 9-4::After the successful test of the virtual reality broadcast of the soccer game, the NBA decided to allow fans to watch live games using virtual reality on their smartphones. Other major sports are expected to follow this trend. As for a new way of working out, using virtual reality technology, an Italian company has recently released an innovative product. It is an indoor bike combined with virtual reality. The rider mounts the bike, puts on the virtual reality gear, and starts riding. The rider then feels as if he is actually riding on a road of his choice, whether a street in a major city, or a calm mountain path, and all without leaving home. As technology develops, sports will become both more enjoyable and more exciting in many ways. That will give people more choices about how they play or enjoy sports.::축구 경기에서 가상 현실 방송이 성공하자 NBA는 팬들이 스마트폰에서 가상 현실을 이용하여 실황 경기를 볼 수 있게 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주류 스포츠도 이 흐름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 현실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운동 방식이라면, 이탈리아의 한 회사가 최근 내놓은 혁신적인 제품을 들 수 있다. 가상 현실과 실내 자전거를 결합한 제품이다. 타는 사람이 자전거에 올라 가상 현실 장치를 착용하고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그러면 타는 사람은 대도시의 거리이건, 조용한 산길이건, 집을 떠나지 않고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실제로 타는 것처럼 느 끼게 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스포츠는 여러 면에서 더욱 즐겁고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경기를 하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에 있어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영시박 9-5::For the past three years, Ethan has been schooling us all in the game of life. He always reminds us that everyone is important to a team's success, though their role on the team may be small. Instead of putting all his efforts into trying to be the team's best player, he has done everything he can to make the team better. As Ethan has shown us, lifting up those around us is also of great worth. When we help others shine, their light will shine on us in return. Yes, sometimes there is something better than being the best.::지난 3년간, Ethan은 삶이라는 경기에서 우리 모두를 가르쳐왔다. 그는 팀에서의 역할이 작을지라도 모두가 팀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일깨워준다. 팀의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대신에, Ethan은 팀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 Ethan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 역시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도와주었을 때, 그 빛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를 비출 것이 다. 그렇다, 때로 최고가 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영시박 10-1::Turn on Your Empathy Firefighter Casey Lessard was busy rescuing people at a crash scene when he saw an injured child. The 4-year-old boy was waiting for the next ambulance. Other members of his family, in worse condition, had already been taken to the hospital. The boy was not so badly injured but was crying more out of fear and confusion than from any pain he was suffering. Lessard imagined how scary it would be to be the child, left alone without knowing what was happening. He took a moment to think about what he could do to comfort the distressed child. Then he took out his smartphone and played for the boy a cheerful animation called "Happy Feet." The dancing penguins on the small screen calmed the boy down. The moment was captured in a photograph and spread fast on the Internet, warming many hearts all over the world. Later, when the news media carried the story that the child's family was struggling to pay their medical bills, donations came in from everywhere. The firefighter's kindness worked a small miracle.::당신의 공감 능력을 켜라 소방관인 Casey Lessard(케이시 레사드)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바삐 사람들을 구조하다가 부상당한 어린이 한 명을 보았다.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다음에 올 앰뷸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다른 가족들은 상태가 더 좋지 않아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 남자아이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통증보다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 Lessard는 자기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혼자 남겨진 아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했다. 그는 극도의 불안에 괴로워하는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아이에게 '해피 피트'라는 유쾌한 애니메이션을 틀어 주었다. 작은 화면에서 춤추는 펭귄들 이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이 사진에 포착되어 급속도로 인터넷에서 퍼져나갔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나중에, 언론에 그 아이의 가족이 치료비를 내지 못해 고충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나갔을 때, 사방에서 기부금이 들어왔다. 소방관의 친절이 작은 기적을 이룬 것이다.
영시박 10-2::What Lessard demonstrated is called empathy−the ability to understand other people's thoughts and feelings and to act on the basis of that understanding. Like Lessard, highly empathic people imagine themselves into the experiences of other people to find out how to best help them. Empathy is not a talent that only special people have. Whoever has a healthy mind is capable of reading other people's minds. It's only a matter of degree. Modern neuroscience tells us that we are all born with empathy and exercise it all the time. In 1990, a team of neuroscientists led by Dr. Giacomo Rizzolatti made a historic discovery while monitoring a monkey's brain. What they discovered was "mirror neurons" in our brain that run a simulation of other people's experiences. When we observe other people, mirror neurons imitate their facial expressions and physical responses in our minds to create a virtual experience. This lets us go through their experiences as if the experiences were ours.::Lessard가 보여 준 것은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근거해 실천하는 능력이다. Lessard처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 속에 자기를 대입해 상상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을지 알아낸다. 공감 능력은 특별한 사람들만 가진 재능이 아니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현대 신경 과학은 우리 모두가 공감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언제나 발휘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1990년, Giacomo Rizzolatti(지아코모 리졸라티) 박사가 이끄는 신경 과학자 팀이 원숭이의 뇌를 추적 감시하다가 역사적인 발견을 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우리 뇌 속에서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가상으로 재현하는 '미러 뉴런(거울 신경 세포)' 이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때, 미러 뉴런은 그들의 얼굴 표정과 신체적 반응을 우리 마음속에서 모방해 가상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이 마치 우리의 경험인 것처럼 겪게 해 준다.
영시박 10-3::The discovery of mirror neurons proved that empathy is a natural human sense, like sight or hearing. Just as we are constantly looking around without focusing on any specific object, we empathize without being conscious of doing so. When we learn that our friends are nervous before an audition, we may imagine their anxiety and try to cheer them up. When we see someone begging on the street, instead of simply walking by, we may consider what it is like to sleep out on a cold winter night and leave some money for them. We may want to do whatever we can to help the person. These little conscious acts of empathy help make our lives happier and our world a better place for everyone. Just as we can close our eyes to what we do not want to see, however, we can also turn off our empathy. When we are too stressed out or too absorbed in ourselves to look out for others, our empathy goes to sleep. When we believe that life is a series of competitions that one must win in order to survive, we put empathy on hold and behave selfishly. We may do harm to others and ignore their pain.::미러 뉴런의 발견은 공감 능력이 시각이나 청각처럼 타고난 인간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우리가 구체적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도 계속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고도 우리는 공감한다. 친구들이 오디션을 앞두고 불안해 하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그들의 불안감을 상상하고 기분을 좋게 해주려 노력할 수도 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대신, 추운 겨울밤 밖에서 잠을 자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고 약간의 돈을 남기고 갈 수도 있다.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소소하고 의식적인 공감 행위가 우리 삶을 더 행복하게 하고 우리 세상을 모두에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있으면 눈을 감듯이, 우리는 공감 능력 역시 꺼둘 수 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거나 우리 자신에게 지나치게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을 살필 여유가 없을 때, 우리의 공감 능력은 잠들어 버린다. 우리가 삶이란 경쟁의 연속이라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겨야 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공감 능력을 대기 모드로 돌려 놓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그들의 아픔을 못 본 척할 수도 있다.
영시박 10-4::People with broken empathy make no connection with others, but 99 percent of ordinary people are affected by the feelings of people close to them. When we see our friends laughing, our mirror neurons fire up and mimic their laughter in our minds, making us happy. Also, we can never be truly happy when people around us are sad. Selfish behavior that hurts others cannot bring us happiness. We need to be aware of the power of empathy and make efforts to put it to good use. Picture the mirror neurons in your brain and try to turn them on. Use them to pay more attention to what people around you are thinking and feeling. The power of empathy will help you change your corner of the world for the better.::고장 난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타인과 유대를 전혀 맺지 못하지만, 99퍼센트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친구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미러 뉴런에 불이 들어와 우리 마음속에서 친구들의 웃음 소리를 흉내내고,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슬퍼한다면 결코 진정으로 즐거울 수 없다. 타인을 아프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우리는 공감 능력의 힘을 의식하고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의 뇌에 있는 미러 뉴런들을 상상해 보고 전원을 켜려고 노력해 보라. 미러 뉴런들을 활용해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보라. 공감 능력의 힘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모퉁이를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영시박 SP-1::A Foolish Doctor A patient was uneasy. His surgery had gone well, and he had fully recovered, but he was not allowed to go home. The problem was that he did not have money to pay the hospital bill. His wife, standing next to him, was also very worried. The man was a farmer, and it was planting season. If he did not return to his farm soon, he would have nothing to harvest in the fall. What should he do? After much hesitation, he went to Dr. Jang's office, the director of the hospital. "They won't let me go home, even though I told them I would pay the bill after the harvest. They don't believe me." Dr. Jang thought for a while. He had seen similar cases before. In such cases, he usually picked up the patient's bill, not expecting to be paid back. This time, however, he did not have enough money. All right, he decided.::바보 의사 환자는 불안했다. 수술은 잘 되었고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집에 갈 수 없었다. 문제는 그가 치료비를 낼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옆에 선 환자의 부인 역시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환자는 농부였고 때는 모내기철이었다. 그가 당장 돌아가 논을 돌보지 않으면 가을에 아무것도 추수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그는 병원장 장 박사의 사무실로 갔다. "병원에서 집에 못 가게 합니다. 가을에 추수하면 갚겠다고 했는데도 말이죠. 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장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슷한 경우를 전에도 보아 왔다. 그럴 때 그는 보통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은 채 환자의 치료비를 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에게도 돈이 별로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는 결심했다.
영시박 SP-2::"Tonight, I will leave the back door open. Just leave." The patient was at a loss. "I can't do that. That would get you into trouble!" "The hospital won't let you go until you pay the bill, but you don't have the money. What can you do? You have to go to your farm for your family. It can't be helped." Later at night, when other patients had gone to bed and most of the staff had gone home, the farmer and his wife quietly approached the back door. When they opened the door carefully, they were surprised to find Dr. Jang standing outside. He handed the man some money. "It's not much, but you'll need it to take the bus home." The farmer and his wife were speechless, weeping and thanking him.::"오늘 밤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떠나시오." 환자는 당황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선생님이 곤란해지시잖아요!" "병원에서는 치료비를 내기 전에는 보내 주지 않을 텐데 당신은 돈이 없지 않소. 어떻게 하겠소? 가족을 살리려면 논에 가 봐야 하지않소. 이 방법 밖에 없어요." 밤 늦게, 다른 환자들이 잠들고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시간에 농부와 그의 부인은 조용히 뒷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장 박사가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 박사는 농부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가 필요할 거요." 농부와 그의 부인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장 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영시박 SP-3::Jang Gi Ryeo, a doctor and social worker, was born in Yongcheon, Pyeonganbuk-do in 1911. He was working at a hospital in Pyeongyang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barely escaped from the war and arrived in Busan. One son had accompanied him, but he had to leave the rest of his family behind. With waves of people escaping from the war, the city was crowded and had little order. Hurriedly built houses filled every corner of the city, as people tried to survive each day as it came. Few people would go to hospitals when they were sick, and when they did, they often didn't get much help. There were too few hospitals and doctors. Also, most people who were sick were too poor to pay their medical bills. They just put up with their illnesses and many of them died. It broke Dr. Jang's heart every time he saw people suffering from sickness without being treated. He wanted to help them, but he did not have the resources. How and where to start? The U.S. army that was in Busan fighting with the UN forces answered his repeated request. They provided him with three field tents and some medicine, with which he and a few helpers set up a free clinic. Word of the clinic spread, and new patients arrived every day. At first it was twenty per day, then fifty, then one hundred. Dr. Jang built an operating table with boards and performed surgeries.::의사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평양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피신하여 부산에 도착했다. 아들 하나는 데리고 왔지만 나머지 가족은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친 그 도시(부산)는 혼잡하고 무질서했다.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남으려고 애쓸 때 급조한 집들이 도시 구석구석을 채웠다. 아파도 병원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고, 찾는다해도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병원과 의사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환자 대부분이 너무 가난하여 치료비를 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아파도 참았고 그 중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병으로 고생해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장 박사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돕고 싶었지만 재원이 없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당시 유엔군과 함께 부산에 주둔해 있던 미국 군대가 그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세 개의 야전 텐트와 약간의 의약품을 제공했고 그것으로 장 박사와 몇몇 봉사자들은 무료 진료소를 차렸다. 진료소가 생겼다는 소식이 퍼지자 새로운 환자들이 매일 찾아왔다. 처음에는 하루에 스무 명이더니 곧 오십 명, 백 명이 되었다. 장 박사는 나무판자로 수술대를 만들고 수술을 했다.
영시박 SP-4::Soon Dr. Jang's free clinic faced a problem-the growing waves of patients made it difficult for his clinic to treat them all. By the end of the war, his clinic had treated more than 200,000 patients for free, but he was not able to maintain his clinic that way any longer. He had to find a way to continue treating poor patients, but he also needed to buy medical supplies and pay the staff at the clinic. After discussing the matter at length with his staff, he set up the Blue Cross Medical Association, the first medical insurance system in Korea. Over the next twenty years, the organization grew and Dr. Jang was able to help thousands of patients, some who could pay and others who could not. Although his patients were his main objects of devotion, Dr. Jang had long been missing what was most important in his life: his wife. She was living in Pyeongyang with the rest of their children. After the division of the two Koreas was finalized, they had to live apart. Dr. Jang lived in a small home, looking forward to the day when he could once again be with his wife. When he missed her the most, he would sing songs she had taught him. He once had a rare opportunity to meet his wife. When the governments of the two Koreas held talks for the reunions of a small number of families separated by the war, he was offered the opportunity to meet her. It was the government's gesture in recognition of his devotion to attending to needy people. He surprised government officials, however, by turning down the offer. "There are ten million people in the north and the south who want to meet their families. How can I take such a special offer, leaving so many people behind?"::장 박사의 무료 진료소는 곧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다 치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 박사의 진료소는 이십만 명 이상의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가난한 환자들을 계속 치료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또한 의약품을 구입하고 직원에게 봉급도 주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직원들과 깊이 의논한 끝에 장 박사는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했다. 그 후 이십 년 동안 그 기관은 성장하였고 장 박사는 수천 명의 환자들을 도울 수 있었고, 그중에는 진료비를 낼 수 있었던 환자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환자도 있었다. 환자들이 장 박사의 주요 헌신 대상이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헌신 대상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나머지 자식들과 함께 평양에 살고 있었다. 남북 분단이 확정된 후 그들은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장 박사는 소박한 집에 살며 아내와 같이 다시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아내가 몹시 그리울 때는 그녀가 가르쳐 준 노래를 불렀다. 한 번은 아내를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남북의 정부가 소규모의 이산가족 만남을 주선하기로 하고 회담을 할 때, 그에게 아내와 만날 기회를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데 헌신한 그를 정부가 인정 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정부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남과 북에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천 만이 있소.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어찌 나만 그런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겠소?
영시박 SP-5::At the repeated requests to take the offer, he said at last. "All right then, but with one condition. If I go to Pyeongyang, I will stay with my wife for the rest of my life. Or I will bring her to Busan. May I do that?" Of course, he could not, so the officials had no choice but to leave him behind. Dr. Jang passed away without seeing his wife and children again. After his death, a worn out letter was found in his pocket. It was from his wife. "I knew you were living the life over there that I thought you would, taking care of poor patients, but not of yourself. Maybe the reason we are living these long years apart is that we have yet to be with each other again." Dr. Jang was an outstanding doctor who had any number of opportunities to become rich and famous. However, his eyes were always fixed on the needy. "The heart of medicine is the understanding of patients' suffering," he said. People called him a foolish doctor, but he took it as praise. "When people call me a fool, I consider my life a success."::관리들이 거듭 요청하자 그는 마침내 말했다. "좋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내가 평양에 가면 나는 여생을 아내와 같이 살겠소. 아니면 아내를 부산으로 데려오겠소. 그래도 되겠소?" 물론 안 되는 일이었다. 관리들은 할 수 없이 그를 두고 떠나야 했다. 장 박사는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주머니에서 낡은 편지가 발견 되었다. 아내로부터 온 편지였다. "저는 당신이 제가 생각했던 대로 자신은 보살피지 않고 가난한 환자들만 보살피며 거기서 살고 계실 줄 알았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온 이유는 우리가 다시 함께 있을 희망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장 박사는 부유하고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늘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의학의 핵심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고 불렀지만 그는 이 말을 칭찬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부르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