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갤럭시 노트GT-N7000 GT-N7005 갤럭시 노트 세라믹 화이트제조사 삼성전자슬로건 폰? 태블릿? 이것은 노트!Phone? Tablet? It's Note!시리즈 삼성 갤럭시 노트 시리즈첫 발매 2011년 10월 후속 갤럭시 노트II형태 바크기 세로 146.85 mm가로 82.95 mm두께 9.65 mm무게 183 g운영 체제 안드로이드 2.3.5 진저브레드2.3.6 4.0.3 아이이스크림샌드위치4.0.4 4.1.2 젤리빈 UI 터치위즈 4.0 네이쳐 UX CPU 3G ARM 홀딩스 코텍스-A9 아키텍처 1.4 GHz 듀얼 코어LTE&T-Mobile US 퀄컴 스콜피온 아키텍처 1.512 GHz 듀얼 코어GPU 3G ARM 홀딩스 말리-400 MP4 266 MHzLTE&T-Mobile US 퀄컴 아드레노 220 266 MHz메모리 공통 사항1 GBN7000DDR2 SDRAM6.4 GB/s N7005LPDDR2 SDRAM2.664 GB/s 저장 종류 eMMC 4.5용량 16 GB32 GB이동식 저장 마이크로SD/SDHC/SDXC 센서 지자기 센서가속도 센서자이로스코프 센서근접 센서조도 센서데이터 입력 정전식 감응 터치 스크린S 펜디스플레이 약 5.29" HD 슈퍼 AMOLED RG-BG 펜타일 매트릭스 픽셀 구조해상도 800 x 1,280 16777216 ) 색상고릴라 글래스 2와콤 입력 모듈외부 디스플레이 HDMI후면 카메라 센서 정보센서 종류삼성전자 S5K4H5 BSI CMOS 이미지 센서화소1.12 µm800만개판형1/4"촬영 성능최대 1080p HD급 동영상 촬영최대 30 fps급 촬영자동 초점/수동 초점플래시LED전면 카메라 센서 정보센서 종류삼성전자 S5K9A1 FSI CMOS 이미지 센서화소1.75 µm200만개판형1/4.5"촬영성능VGA급 동영상 촬영고정 초점사운드 사운드 칩셋 야마하 C1-YMU823음원 재생 능력 16 비트44.1 kHz음장 사운드 얼라이브연결 USB 2.0USB 온더고MHLHDMI3.5 mm 미국식 TRRS 폰 커넥터 삼성 갤럭시 노트는 삼성전자가 제조/판매하는 안드로이드 패블릿 스마트폰이다. 2011년 9월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 국제가전박람회 2011 에서 공개하여 2011년 10월에 출시했다. 기존의 스마트폰에 비해 큰 디스플레이와 일본 와콤의 펜 태블릿 기술을 도입한 정전식 터치펜 S펜의 탑재로 필기가 가능한것이 특징이며, 다른 스마트폰에 비해 커다란 5.29"의 디스플레이를 적용하여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의 완충역할을 하며 패블릿 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목차 1 디자인 및 하드웨어 1.1 AP 및 통신규격 1.2 메모리 1.3 디스플레이 1.4 배터리 1.5 카메라 1.6 기타 2 S펜 스타일러스 3 색상 4 운영체제/소프트웨어 4.1 안드로이드 4.1.2 젤리빈 4.1.1 특수 기능 4.2 안드로이드 4.0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4.2.1 특수 기능 4.3 안드로이드 4.1 젤리빈 4.3.1 특수 기능 5 변종 5.1 대한민국 5.1.1 SHV-E160S/K/L 5.2 미국/ 캐나다 5.2.1 SGH-I717 5.2.2 SGH-T879 5.2.3 SGH-I717R 5.3 중국 5.3.1 GT-I9228 5.3.2 SCH-I889 5.3.3 GT-I9220 5.4 일본 5.4.1 SC-05D 6 같이 보기 7 각주 8 외부 링크 디자인 및 하드웨어 전반적인 디자인은 2011년의 갤럭시 S 시리즈인 갤럭시 S II를 따른다. 기본 색상은 카본 블랙과 세라믹 화이트로 총 2종이며 이후 여러 색상들이 추가되었다. AP 및 통신규격 사양 자체는 우선 AP로 삼성 엑시노스 4210을 사용한다. ARM Cortex-A9 듀얼코어 CPU와 ARM Mali-400 쿼드코어 GPU를 사용한다. 이는 갤럭시 S II 3G 모델와 동일한 AP를 탑재한 것이기에 성능 면에서 검증이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의 이동통신사들을 포함해 일부 이동통신사의 요구로 인해 퀄컴 스냅드래곤 S3 APQ8060 & MSM8660을 사용하기도 했다. 3G WCDMA 규격 중 HSPA+ 다운로드 최대 21 Mbps까지 지원한다. 특히 해당 규격은 4G 기술로도 인정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일부 이동통신사의 요구로 인해 4G LTE를 추가로 지원하는 모델이 존재한다. 지원 LTE 레벨은 Cat.3로 다운로드 최대 100 Mbps, 업로드 최대 50 Mbps를 보장한다. 메모리 RAM은 LPDDR2 SDRAM 방식이며 1 GB다. 내장 메모리는 16 GB와 32 GB로 나뉘며 micro SD 카드로 용량 확장이 가능하다. 디스플레이 디스플레이는 5.29인치 WXGA 800p 해상도를 지원한다. 패널 형식은 HD Super AMOLED로, 패널 공급사는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였으나, 이후 삼성 디스플레이로 회사가 개편되면서 공급사 역시 변경되었다. 픽셀 배열은 갤럭시 S II가 RGB 서브픽셀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도로 RG-BG 펜타일 서브픽셀을 사용한다. 배터리 배터리 용량은 착탈식 2500 mAh이다. 이는 갤럭시 S II 3G 모델보다 약 850 mAh정도 용량이 증가했다. 카메라 후면 카메라로는 800만 화소급의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 S5K4H5 센서를 탑재하며 전면 카메라는 200만 화소 카메라를 사용한다. 기타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와콤의 기술을 탑재해 와콤 디지타이저를 지원한다. 256 단계의 필압을 지원하며 내장된 펜 이외에도 와콤 디지타이저라면 호환이 된다. 삼성전자는 이를 S펜이라 명명했으며 초기 대형 디스플레이 탑재로 인한 거부감을 S펜 콘텐츠로 상쇄시키는 등 시장에서 합격점을 받게된다. S펜 스타일러스 256레벨로 필압을 감지하는 스마트폰의 압력 감지 S 펜 스타일러스를 이용하여 필기를 하거나 그림이나 그래프등을 그릴 수 있다. 색상 카본 블루 세라믹 화이트 베리 핑크 운영체제/소프트웨어 안드로이드 4.1.2 젤리빈 특수 기능 S 노트 : S 펜을 통한 다양한 노트 필기를 비롯하여, 디자인, 수식인식, 문자인식, 도형인식 등을 할 수 있다. 챗온 안드로이드 4.0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2012년 5월 10일 독일에서 안드로이드 4.0.3 아이스크림샌드위치로의 업그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주요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멀티태스킹 및 앱 일부 사용성 개선 S 노트 기능 업그레이드 그리고 2012년 7월 11일 독일에서 4.0.4 아이스크림샌드위치의 업그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주요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Nature UX 터치위즈 적용 일부 아이콘 변경 팝업 플레이 기능 추가 특수 기능 팝업 플레이 : 동영상을 작은 팝업창 형태로 재생하는 기능으로, 동영상이 팝업창 형태로 떠 있는 동안에는 화면의 일부분만 점유하며, 다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 있다. 안드로이드 4.1 젤리빈 2013년 2월 18일 N7000 모델에 대한 안드로이드 4.1.2 젤리빈로의 업그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주요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다음 사항도 같이 적용되었다. UI 개선 많은 알림 토글과 새로운 알림창 exFAT 포맷 지원 삼성 S 클라우드 다이렉트 콜, 멀티 윈도우, 페이지 버디, 스마트 로테이션, 스마트 스테이 등의 기능 추가 두개의 홈스크린 모드 특수 기능 S 빔 스마트 스테이 : 앞면 카메라를 통해 사용자의 눈동자와 얼굴을 인식하여 사용 중일 때에는 디스플레이가 꺼지지 않도록 유지한다. 스마트 로테이션 : 중력 센서를 사용하여 자동 회전을 하지 않고 앞면 카메라를 통해 사용자의 얼굴을 인식하여 자동 회전 여부를 결정한다. 페이지 버디 : 도킹, 로밍, 이어폰 삽입등의 특별한 상황에 따라 그에 필요한 기능을 홈화면에 자동적으로 추가한다. 다이렉트 콜 : 문자 전송할때, 부재중 전화시, 전화번호 검색 등 전화번호가 화면에 보일 때 휴대전화를 귀에 대면 바로 전화가 걸린다. 변종 대한민국 SHV-E160S/K/L SHV-E160S는 SKT전용 대한민국 이동통신 3사 전용으로 출시된 GT-N7005 기반의 LTE 모델로, FM 라디오 대신 지상파 DMB 튜너가 탑재되고 NFC USIM을 지원한다. 미국/ 캐나다 구글 표준의 하단 4버튼을 기본으로 지원한다. SGH-I717 AT&T 전용으로 NFC를 지원한다. SGH-T879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SGH-I717R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중국 GT-I9228 차이나 모바일을 통해 출시된 제품이다. SCH-I889 차이나 텔레콤 전용으로 출시된 제품이다. GT-I9220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일본 SC-05D 와콤에서 출시한 제품이다. 같이 보기 삼성 갤럭시 S II 각주 ↑ 가 나 다 4.1.2 젤리빈 업그레이드부터 지원 ↑ http://www.samsung.com/global/business/semiconductor/product/cmos-imaging/detail?productId=7721&iaId=683 ↑ http://www.samsung.com/global/business/semiconductor/product/cmos-imaging/detail?productId=7029&iaId=218 ↑ DannyD. “Ice Cream Sandwich for the Samsung Galaxy Note starts rolling out”. SAMMOBILE. ↑ DannyD. “Confirmed: Samsung start Android 4.0.4 updates for Galaxy Note”. SAMMOBILE. ↑ FaryaabS. “Samsung releases Android 4.1.2 Jelly Bean update for the Galaxy Note”. SAMMOBILE.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삼성 갤럭시 노트 삼성 갤럭시 노트 - 공식 웹사이트 vdeh삼성 갤럭시 노트 시리즈스마트폰 갤럭시 노트 갤럭시 노트II 갤럭시 노트3 갤럭시 노트4 갤럭시 노트 엣지 갤럭시 노트5 갤럭시 노트7 갤럭시 노트8 갤럭시 노트9 갤럭시 노트10 태블릿 갤럭시 노트 10.1 갤럭시 노트 8.0 갤럭시 노트 프로 12.2 vdeh삼성 모바일2004년 ~ 2006년 가로본능 V5400 V600 V840 스킨 2007년 컬러재킷 B820 슬림폴더 HSDPA 네온 블루투스 내비게이션 와이브로 스마트폰 디럭스 미츠 와이브로 스마트폰 2 디럭스 미츠 2 울트라 메시징 멀티터치 I 블랙잭 2008년 블랙잭 II 인스팅트 에픽스 델브 글라이드 에이스 비홀드 이터니티 사가 토코 픽손 옴니아 메모아 와이브로 커뮤니케이터 햅틱 HSUPA 스마트폰 소울 울트라 메시징 II 멀티터치 II 스타일 보고서 햅틱 II 햅틱 온 T*옴니아 써클 2009년 몬디 울트라 터치 토코 울트라 에디션 C6625 옴니아 HD 비트 DJ 토코 라이트 아빌라 스타 제트 프레스톤 픽손12 갤럭시 코비 옴니아 II 옴니아 프로 B7330 옴니아 프로 B7610 옴니아 라이트 제니오 쿼티 마벨 B3310 델파이 제니오 슬라이드 갤럭시 스피카 임프레션 피네스 프로펠 프로 인스팅트 S30 마그넷 A177 익스클레임 하이라이트 인스팅트 HD 인트레피드 모먼트 미식 플라이트 비홀드 II 햅틱 빔 햅틱 팝 햅틱 8M 풀터치 와이브로폰 울트라 햅틱 연아의 햅틱 햅틱 아몰레드 햅틱 착 T*옴니아 II 조르지오 아르마니 아몰레드 12M 코비F 옴니아 팝 오즈 옴니아 쇼 옴니아 매직홀 IT Style 2010년 디바 몬테 웨이브 갤럭시 A 갤럭시 S S3370 리브르 갤럭시 아폴로 갤럭시 유로파 갤럭시 빔 갤럭시 탭 조르지오 아르마니 갤럭시 S 웨이브525 웨이브 II 옴니아 7 라이브 블루 어스 클러치 아몰레드 빔 컬러 스캔 아몰레드 3D 미니멀 풀터치 와이파이 풀터치 노리 코비 N 코비 F 노리 F 2011년 B5722 웨이브 533 웨이브 575 챗 335 갤럭시 미니 갤럭시 지오 갤럭시 피트 갤럭시 에이스 갤럭시 프로 갤럭시 네오 웨이브 723 옴니아 W 갤럭시 탭 10.1 V 갤럭시 S II 인퓨즈 4G 갤럭시 탭 10.1 갤럭시 탭 8.9 갤럭시 R 갤럭시 엑스커버 갤럭시 S 플러스 갤럭시 W 갤럭시 Y 갤럭시 Y 프로 토코 아이콘 제니오 II 웨이브 578 갤럭시 S II LTE 웨이브 Y 웨이브 M 웨이브 III 갤럭시 노트 갤럭시 탭 7.0 플러스 갤럭시 탭 10.1 N 갤럭시 M 프로 DMB 슬라이드 와이즈 와이즈 클래식 미니멸 폴더 미니멀 폴더 2012년 갤럭시 Y 프로 듀오스 갤럭시 Y 듀오스 갤럭시 에이스 듀오스 갤럭시 에이스 플러스 갤럭시 M 스타일 갤럭시 탭 7.7 갤럭시 포켓 갤럭시 S 어드밴스 갤럭시 에이스 2 갤럭시 미니 2 갤럭시 탭 2 7.0 갤럭시 탭 2 10.1 옴니아 M 갤럭시 S III 갤럭시 R 스타일 갤럭시 챗 갤럭시 빔 갤럭시 노트 10.1 갤럭시 트렌드 갤럭시 노트 II 갤럭시 뮤직 갤럭시 S III 미니 갤럭시 익스프레스 아티브 S 아티브 탭 와이즈 2 2013년 갤럭시 프리미어 갤럭시 그랜드 아티브 오디세이 갤럭시 S II 플러스 갤럭시 Y 플러스 렉스 60 렉스 70 렉스 80 렉스 90 갤럭시 엑스커버 2 갤럭시 트렌드 2 갤럭시 노트 8.0 갤럭시 S4 갤럭시 영 갤럭시 페임 갤럭시 스타 갤럭시 포켓 네오 갤럭시 윈 갤럭시 코어 갤럭시 메가 5.8 갤럭시 메가 6.3 갤럭시 S4 미니 갤럭시 S4 줌 갤럭시 S4 액티브 갤럭시 탭 3 7.0 갤럭시 탭 3 8.0 갤럭시 탭 3 10.1 갤럭시 골든 갤럭시 에이스 3 갤럭시 노트 3 갤럭시 노트 10.1 2014 에디션 갤럭시 트렌드 3 갤럭시 라운드 갤럭시 스타 프로 갤럭시 익스프레스 2 2014년 갤럭시 그랜드 2 갤럭시 탭 3 라이트 갤럭시 노트 프로 12.2 갤럭시 탭 프로 8.4 갤럭시 탭 프로 10.1 갤럭시 탭 프로 12.2 갤럭시 코어 LTE 갤럭시 코어 어드밴스 갤럭시 그랜드 네오 갤럭시 노트 3 네오 갤럭시 프레시 갤럭시 S3 슬림 갤럭시 S5 갤럭시 빔 2 갤럭시 에이스 스타일 아티브 SE 갤럭시 탭 4 7.0 갤럭시 탭 4 8.0 갤럭시 탭 4 10.1 마스터 갤럭시 S5 액티브 갤럭시 K 줌 갤럭시 W 갤럭시 탭 S 8.4 갤럭시 탭 S 10.5 Z 갤럭시 코어 라이트 갤럭시 코어 미니 갤럭시 에이스 4 갤럭시 영 2 갤럭시 스타 2 갤럭시 코어 2 갤럭시 알파 갤럭시 S5 미니 갤럭시 노트 4 갤럭시 노트 엣지 갤럭시 메가 2 갤럭시 코어 맥스 갤럭시 A5 갤럭시 그랜드 프라임 갤럭시 A3 갤럭시 코어 프라임 2015년 갤럭시 E7 갤럭시 E5 갤럭시 그랜드 맥스 갤럭시 A7 갤럭시 J1 갤럭시 S6 갤럭시 S6 엣지 갤럭시 탭 액티브 갤럭시 탭 A 8.0 갤럭시 탭 A 9.7 갤럭시 S6 액티브 갤럭시 J5 갤럭시 J7 갤럭시 A8 갤럭시 탭 S2 8.0 갤럭시 탭 S2 9.7 갤럭시 노트 5 갤럭시 S6 엣지 플러스 갤럭시 J1 에이스 갤럭시 J2 갤럭시 On5 갤럭시 On7 갤럭시 J3 갤럭시 폴더 2016년 갤럭시 A5 갤럭시 A7 갤럭시 A9 갤럭시 A3 갤럭시 S7 갤럭시 J5 갤럭시 J7 갤럭시 노트 7 2017년 갤럭시 A3 갤럭시 A5 갤럭시 S8 갤럭시 J7 갤럭시 J5 갤럭시 A7 갤럭시 노트 FE 갤럭시 노트 8 2018년 갤럭시 A8 &action=edit&redlink=1" title="삼성 갤럭시 A8 플러스 ">갤럭시 A8 플러스 ) 갤럭시 S9 갤럭시 A9 갤럭시 노트 9 2019년 갤럭시 S10 갤럭시 폴드 삼성전자삼성 모바일 프레스삼성전자공개는 하였으나 출시되지 않은 모델은 글꼴을 기울임처리 vdeh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이서 beTouch E110 리퀴드 A1 리퀴드 E 리퀴드 메탈 알카텔 OT-980 OT-990 에이수스 패드폰 젠폰 블랙베리 Priv DTEK50 DTEK60 KEYone 모션 구글 안드로이드 데브 폰 플레이 에디션 넥서스 원 S 갤럭시 4 5 6 5X 6P 안드로이드 원 픽셀 픽셀 2 HTC 어메이즈 4G 아리아 차차 디자이어 Eye 620 HD S X Z 드림 드로이드 인크레더블 4G LTE HTC 인스파이어 에보 4G 시프트 4G 디자인 4G 3D 4G LTE 익스플로러 히어로/드로이드 에리스 인크레더블 S/드로이드 인크레더블 2 J 버터플라이/드로이드 DNA 레전드 매직 원 시리즈 S V X 원 원 원 M9 원 미니 원 미니 2 원 맥스 HTC 10 레이더 4G Rezound 살사 센세이션 T-모바일 US G1 마이터치 3G 마이터치 3G 슬라이드 디자이어 Z 마이터치 4G 마이터치 4G 슬라이드 타투 선더볼트 U 시리즈 U11 U 울트라 와일드파이어 S 화웨이 T-모바일 펄스 IDEOS U8150 U8800 소닉 어센드 노바 P10 P20 메이트 S 8 9 10 아너 LG G 시리즈 2 2 미니 3 G3 스타일러스 플렉스 프로 2 프로 라이트 x 플렉스 2 4 5 6 7 GW620 옵티머스 옵티머스 2X 옵티머스 3D 옵티머스 4X HD 옵티머스 블랙 옵티머스 시크 옵티머스 G 옵티머스 L9 옵티머스 LTE 옵티머스 원 옵티머스 Q 옵티머스 슬라이드r 옵티머스 Vu II 옵티머스 Vu 옵티머스 Zip VS740 V 시리즈 V10 V20 V30 V35 V40 V50 메이주 M9 PRO 5 MX 3 4 MX4 Pro 5 기타 아마존 파이어 폰 캐노니컬 우분투 엣지 카시오 G'zOne Commando 델 베뉴 에센셜 폰 가르민 Nüvifone 긱스폰 원 인텔 AZ210 Karbonn a15 교세라 에코 레노버 LePhone/IdeaPhone 마이크로맥스 캔버스 A1 넥스트비트 로빈 펩시코 펩시 P1 버투 Ti 모토로라 아트릭스 4G 2 백플립 참 클릭 XT 2 디파이 Devour 드로이드 2 3 4 드로이드 바이오닉 드로이드 맥스 & 울트라 모토로라 드로이드 미니 드로이드 프로/XPRT 모토로라 레이저 맥스 M HD 맥스 HD 모토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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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오린화 수소산 일반적인 성질 IUPAC 이름 Hydrofluoric acid 화학식 HF의 수화물 별칭 fluoric acid; fluorhydric acid CAS 번호 7664-39-3 물리적 성질 상태 액체 원자량 20 g/mol 밀도 1.15 g/cm3 형태 무색 열화학적 성질 안전성 유럽 연합위험 규정 R26/27/28 , R35 플루오린화 수소산은 플루오린화 수소의 수용액으로 불화수소산, 불산, 플루오르산이라고도 한다. 목차 1 산도 2 용도 3 독성 4 사건 사고 5 외부 링크 산도 플루오린화 수소산은 강산으로 분류되는 염산이나 브로민화 수소산 등의 다른 할로젠화 수소들과 달리 플루오린과 수소 사이에 강한 수소 결합이 작용하여, 이온화가 잘 일어나지 않아 약산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플루오린화 수소산은 pH 농도가 높은 염산이나 황산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데, 그 이유는 염산 및 황산 등의 경우 물질과 직접적으로 닿는 부분부터 노출된 범위안에서 부식되지만 플루오린화 수소산의 경우 수소 결합을 통한 강한 반응력으로 골수 조직까지 침투하여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HF + H2O H3O+ + F− 하지만 플루오린화 수소의 농도가 높아지면 산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2 HF H+ + FHF− 용도 유리와 금속을 녹이기 때문에 유리 세정에 이용된다. SiO2 + 4 HF → SiF4 + 2 H2O SiO2 + 6 HF → H2SiF6 + 2 H2O 치약 제조에 이용된다. 반도체 및 전자부품의 식각공정에 이용된다. 살균 및 소독제로 이용된다. 자동차부품, 기계부품의 식각공정에 이용된다. 독성 플루오린화 수소산에 의한 화상 플루오린화수소산이 신체에 닿을 경우 플루오린화 수소가 신체의 수분과 수소 결합을 하면서, 뼈 속까지 침투하여 심하면 신체를 절단해야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굉장히 유독한 산이다. 또한 흡입하면 몸속 장기들이 찢어 지거나 녹아내리게 할 수 있는 유독물이며, 많은양의 플루오린화 수소산을 코로 흡입하면 구역질, 구토, 각혈 등을 할 수 있다. 사건 사고 2012년 9월 27일: 대한민국 구미시 에서 불산이 유출되어 구미 주민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 2012년 구미 가스 누출 사고를 참고. 2016년 6월 04일: 대한민국 금산군 에서 불산이 유출되어 금산 주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외부 링크 “플루오린화 수소산”. 《네이버캐스트》. 전거 통제 GND: 4209062-3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저자 장자크 루소국가 프랑스언어 프랑스어 발행일 1762년
《사회계약론》은 장자크 루소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로 1762년에 출판된 책이다. 1755년 무렵부터 백과전서파와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 루소가 파리의 살롱 생활에서 은퇴할 생각으로 그 이전에 완성시킨 것이 이 《사회 계약론》이며, 《에밀》과 같은 해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은 당시에 반드시 이해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루소는 백과전서파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박해까지 받아 실의와 불행의 만년을 초래했다.
《사회계약론》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다를 바가 없으나 전자에는 새로운 사회의 적극적인 구상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후자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체는 4편으로 나뉘는데 이론적인 기본은 '일반의지'론과 '사회 계약'론의 둘이다. '일반의지'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의지를 말한다. 루소는 사회 상태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그는 그것을 인간의 의지 속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일반의지야말로 주권의 기초이며 법이나 정부도 여기서 나온다. 이 국민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이며 그르친다는 예외도 없고, 타인에게 양도나 분할도 불가하다. 따라서 주권 또한 절대적이다. 이 루소의 인간주권론은 가장 철저한 인간주권론이며, 더구나 그는 거기서 인간주권의 절대성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따라서 루소가 구상한 국가는 의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직접민주제의 국가이다. 국민의 일반의지에 바탕을 둔 국가를 형성하는 수속을 제시한 것이 '사회 계약'론이다. 각 개인은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면서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의 약속을 하고 국가를 형성한다. 이 약속이 사회 계약이다. 그것은 주권자인 개개인 상호간의 약속이며, 지배자에 대한 국민의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립된법서제 지 사항 장자크 루소 저, 박호성 역, 사회계약론 외, 책세상, 2015 -루소 전집 중 제8권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title="카카오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 사회계약론 -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 사회계약론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회계약론&oldid=24173237" 분류: 프랑스의 책1762년 책철학 책정치학 책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NederlandsPortuguês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中文文言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17: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공리주의는 19세기 이래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윤리적 사상이다.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대행복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 사상은 근대 시민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고전경제학의 사상적 기초와 자본주의 질서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제1원리인 개개인의 사익추구가 공익의 보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배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이 대표적 공리주의자들이다.
목차 1 역사 2 공리주의의 비판 2.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2.2 공리주의와 자본주의 3 각주 4 참고 문헌
역사
공리주의의 체계화는 18세기 말 영국의 벤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공리의 크고 작음을 입법 및 도덕의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했다. 즉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쾌락을 증대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행위는 옳고, 그 반대의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벤담은 각자가 자기 공리의 최대를 구할 때 그 총계로서 사회 전체의 공리도 최대로 된다고 생각하였다.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직면해서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이론의 후반 부분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그러나 공리의 원리에 있어서도 도덕의 기준은 변함이 없었다. 공리주의의 비판 삶에 있어 옳고 그름 즉, 선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명쾌하게 풀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나 원리가 있는가를 두고, 수많은 철학자들은 줄곧 골머리를 앓아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뜨겁게 논쟁 중이다. 공리주의는 최고원리에 대해 하나의 기준을 제창했다. 공리주의는 행복과 '쾌락'만을 윤리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공리주의 비판자들은 철학적으로 깊이 분석해볼 때 그 한계가 금세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부터가 철학적으로 아직 정답이 없는 오랜 난제다. 물론 공리주의는 그것이 쾌락이라고 단언하지만 쾌락을 정의하는 것도 간단치 않다. 쾌락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를 쾌락이라고 정의하지만, 그럴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고통이 없는 진정한 쾌락이란 없을뿐더러 고통을 통과할 때라야 오히려 쾌락이 배가될 수 있다. 따라서 공리주의 비판자들은 쾌락을 유일한 도덕의 기초로 삼은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공리주의자들이 이에 대해 납득할만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경험, 과학주의적 도덕을 배반하고 보편 윤리에 반하는 모순을 빚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의 '쾌락'이 수반적으로 윤리의 한 척도는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선악을 판단하는 하나의 최고 원리나 잣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공리,쾌락 외에 도덕의 제2원리로 주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도 구호에 불과할 수 있다. 도덕의 최고원리가 개인의 쾌락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공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이익과 공리의 우선적 추구가 사회적 공공적 복지를 담보하기는커녕 파괴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초기 방임적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익추구는 공익을 저절로 보장한다 했지만 결과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모순을 낳아 대대적으로 구조적 수술을 하고 수정 자본주의로 거듭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반성이나 보완없이 계속해서 쾌락, 이익 우선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철학으로서 문제가 많다. 밀의 공리주의는 초기의 벤담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양적 쾌락에서 질적으로의 쾌락을 주장한 것이 돋보이는 점이다. 그러나 쾌락을 정신적 쾌락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으며, 정신적 쾌락이 비정신적, 양적 쾌락보다 우월한 가치를 띤다는 논리도 철학적으로는 입증하기 어렵다. 물질적 쾌락이 어느 정도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정신적 가치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정신적 가치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의 결함인 사익의 추구와 사회적 공익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밀의 치명적 한계이다. 개인을 교양하고 계몽한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속성 상 구조적 변화와 변혁이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밀은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벌린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쾌락, 사익추구라는 시각과 전체의 복리증진이라는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채 문제해결에 실패했다. 경험주의를 자처하고도 윤리의 당위만 설파할 뿐 과학적 논증을 하지 않음으로써 모순의 늪을 헤맸다"는 것이다. 결국, 공리주의는 윤리, 선악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공리주의는 철학이 도전해야 할 윤리의 최고원리를 두고 깊이 고민했고 철학이 조롱당하는 현실에서 그 빛을 완전히 잃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 표어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표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주는 일치된 학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 표어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벤담은 쾌락을 수량화할 수 있고 측정가능한 것으로 보는 철저한 양적 공리주의자다. 양적 공리주의자는 쾌락을 수량화하려 하지만, 사람마다 쾌락이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인 쾌락이 수량화 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모순은 이 표어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벤담의 관심은 행복과 쾌락의 총량이지 이의 합리적 분배나 평등이 아니었다. 벤담은 모든 사람의 행복의 보장, 즉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 위치에 있는 자유방임적 보수주의자였다. 따라서, 이 명제는 말 그대로 최대 대중이 아니라 최대 수량을 중시한 총량의 성장주의를 뜻한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벤담의 최대다수가 지칭하는 대상 역시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최대다수는 시민을 지칭하지만, 시민이라는 단어는 대중을 뜻하지 않는다. 고대에서의 시민은 대다수 노예를 뺀 소수의 자유민을 뜻했고 근대의 시민도 소수의 부르주아를 뜻했다. 이 표어에서의 대다수 역시 대중이 아니고 귀족에 비해서만 다수인, 사실상의 소수 부르주아를 뜻한다고 해석된다. 벤담 시대의 대다수 노동자 농민은 주권도 없었는데, 이런 처지 역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의견 중에서는, 이 명언을 벤담이 직접 창안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벤담은 스스로 이탈리아 법철학자인 베카리아로부터 차용했다고 밝혔고 똑같은 내용의 문구가 다른 여러 문헌에서도 발견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한 또 다른 명제 역시 다른 방법으로 해석된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가 되기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이는 흔히 정신적 쾌락을 예찬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물질적 성장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물질적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앞의 구절은 이 설명을 더 명확히 해 준다. 짐승이 누리는 쾌락을 마음껏 누리게 해준다고 해서 짐승이 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바보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팔자에 더 만족을 느낀다고 아무리 그럴듯한 설득을 하더라도 지성을 갖춘 사람이 바보가 되고 교양있는 사람이 저급한 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밀은 정신적 가치와 쾌락을 우선하고 중시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쾌락에 매몰되어 타락하고 위기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안으로서 정신적 쾌락의 가능성을 역설한 것이지,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밀이 보수주의의 추앙과 진보주의의 비판을 받도록 만들었다. 공리주의와 자본주의 공리주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윤리화한 것이다. 그것은 가지 각색의 대상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을 동일한 기준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예컨대 시와 빵은 본래적으로 이질적인 기쁨을 준다. 어느 쪽이 공리가 큰가는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그것을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같은 기준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품 경제를 그대로 윤리화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나 빵도 일정한 가격으로 팔린다. 사람들은 그 가격에 의해서 그것이 인간에 대하여 갖는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서 공리주의란 실은 가격을 쾌락과 고통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이 문제로 되는 한에 있어서는 공리를 감득하는 주체는 더욱 명확해진다. 공산주의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인간관 관점을 지지했지만, 공리주의가 내포한 자본주의 원칙에 대해선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 사회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쾌락'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판단했다. 거래의 속성을 전제로 하고 거래에 대해서 연역적으로 추론해볼 때, 거래에 참가한 사람은 서로 상대적인 쾌락을 느꼈지만, 그것은 한정된 쾌락이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쾌락은 결국 노동으로 인해 파급된 상품의 양,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주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다수의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한 만큼 상품의 양을 분배받지 못하며,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용도로 착취당한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되면 쾌락은 하나의 개인에게 쏠리게 되어있다. 사회 전체로 볼 때, 이러한 잉여가치 착취 행위가 생산물의 양을 더 많이 뽑아낼 수 있는 '무기'와 같다고 추론한다면, 소극적 공리주의자들은 근대자본주의가 정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배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저절로 조절되므로, 문제가 없다."란 것을 전제로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산물들을 단순히 더 많이 파급시키는 자본주의가 공리주의적 인간관 실현에 맞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생산품의 총량' 그 자체는 인류의 쾌락 증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분배되어서 사용을 할 때라야 비로소 쾌락이 증진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잉여가치 독식에 대해 이해를 하지 않고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를 '쾌락 증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체제'라고 믿는 소극적 공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법칙을 절대화 하는 결함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각주 ↑ 가 나 공리주의,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서병훈 역〈공리주의〉책세상- 144,145쪽 ↑ 박종대 역《천마디를 이긴 한마디》북스코프,253쪽 ↑ 서병훈 역《공리주의》27쪽 참고 문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title="카카오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정치 이념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 쇼비니즘 민족중심주의 보수주의 문화보수주의 재정보수주의 녹색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전통보수주의 자본주의 자유방임주의 수정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초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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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공유지의 비극:: 공유지의 비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gRequestId":"XUXskQpAMEwAADYEugMAAADR" "user.tokens":"loading" 공유지의 비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셀슬리 공유지의 소. 공유지의 비극은 과잉 이용에 대한 예시 중 하나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미국 UCSB 생물학과 교수인 개럿 하딘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논문의 제목이기도 하다. 경제학을 포함한 많은 분야의 논문과 저서에서 즐겨 인용할 만큼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고기와 같이 공동체의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은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당세대에서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시장실패의 요인이 되며 이러한 자원에 대해서는 국가의 관여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해당사자가 모여 일정한 합의를 통해 이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형성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론과 예시
하딘의 이론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공유지를 이용해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있는 유럽 어느 장원과 관련된 한 예제이다. 이 예제는 1833년 경제학에 대해 글을 쓰던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의 팜플릿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딘의 예제에서 목동들의 관심사는 과밀방목으로 인해 공유지가 손상될지라도 소를 공유지에 집어넣는 것이다. 100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는 제한된 공유지에서, 100 마리 이상의 양을 기르면 결국 목초지는 과도하게 풀이 뜯겨 재생산이 되지 못하고 점차로 황폐해져 간다는 것이다. 축산업자들은 너도 나도 공유지를 이용할 것이고, 자신의 부담이 들지 않는 공짜이기 때문에, 공유지에 양을 계속 풀어 놓기만 하지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풀이 없어진 초지에는 양을 기를 수 없어 축산업자들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개인들의 이익 추구에 의해 전체의 이익이 파괴되어 공멸을 자초한다는 개념이다.
관련 서적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클레이 서키 지음 외부 링크 가렛 하딘의 원문 from 사이언스 공공 디지털 도서관 공유지의 비극 신화 by 이언 오거스 전 세계적인 공유지의 비극 by John Hickman and Sarah Bartlett 공유지의 비극 Explained with Smurfs by Ryan Somma vdeh게임 이론의 주제들정의 일반형 게임 전개형 게임 협조적 게임 정보 집합 선호 균형 개념 내쉬 균형 부분게임 완전균형 베이즈-내쉬 균형 완전베이즈 균형 손떨림 완전균형 적절한 균형 입실론-균형 상관 균형 순차 균형 준 완전 균형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위험 우월 파레토 효율 계수반응 균형 자기확인 균형 전략 우월 전략 순수전략 혼합전략 팃포탯 무자비 전략 담합 역진 귀납법 게임의 종류 대칭적 게임 완전 정보 동시적 게임 순차적 게임 반복 게임 신호 게임 값싼 대화 제로섬 게임 매커니즘 디자인 협상 문제 확률적 게임 큰 포아송 게임 비전이적 게임 글로벌 게임 여러가지 게임의 예 죄수의 딜레마 여행자의 딜레마 조정 게임 치킨 게임 지네 게임 지원자의 딜레마 달러 경매 성 대결 게임 사슴 사냥 게임 동전 맞추기 최후통첩 게임 마이너리티 게임 가위 바위 보 해적 게임 독재자 게임 Public 공공재 게임 블로토 게임 소모전 게임 엘 파롤 바 문제 케이크 자르기 문제 쿠르노 게임 교착 게임 식사자의 딜레마 평균의 2/3 추측하기 쿤의 포커 내쉬 협상 게임 선별 게임 신용 게임 공주와 괴물 게임 정리 최소최대정리 정화 정리 전래 정리 현시 원칙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같이 읽기 공유지의 비극 전원지불경매 게임 이론 상 게임의 목록 공평한 분할 vdeh재산권소유자에 따른 분류 공유재산법 협동조합 사유 공공 국유 태생에 따른 분류 지식 개인 이론 상품 비배제성 무임승차 문제 게임 이론 지공주의 선물경제 렌트법 지대추구 소유권 자기 국유 공유지의 비극 응용 상속 물권법 지역권 부동산 권리 공중 어업 사냥 토지 스쾃 통행권 용수 수리 탈취/재분배 징수 인클로저 공용징수 불법 어업 토지개혁 해상강도 본원 축적 민영화 노예제 인신매매 조세 상속세 인두세 누진세 재산세 도둑 학자 프레데릭 바스티아 로널드 코스 헨리 조지 개럿 하딘 데이비드 하비 존 로크 통치론 카를 마르크스 마르셀 모스 존 스튜어트 밀 엘리너 오스트롬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데이비드 리카도 머레이 N. 로스바드 장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애덤 스미스 국부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유지의_비극&oldid=23418938" 분류: 사회학게임 이론경제적 불평등시장 실패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LietuviųMalagasy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ščinaSvenskaதமிழ்ไทย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5일 18: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명칭
일반적으로 임진년에 일어난 왜의 난리란 뜻에서 임진왜란이라 칭한다. 그 밖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조일전쟁,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임진전쟁,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 하여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 전쟁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 혹은 조선을 도와 왜와 싸웠다 하여 항왜원조라고도 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을 받아 임진조국전쟁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7년간의 전쟁이라 하여 7년 전쟁으로도 부른다. 배경과 원인 조선 정치 상황 이 부분의 본문은 사화입니다.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간 창업을 주도 했던 개국 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되자 그 부패가 극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 재정립을 강조하면서 전반적인 국가 통치질서를 재정립하려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 훈구파 세력은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두 세력의 대립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고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여 더욱 불거졌다. 그 결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크게 타격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고 사림도 내홍 탓에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모후 문정왕후의 대리 정치 탓에 외척 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권력이 개편되면서 부패가 극심하였다.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였으며, 때문에 국정에 들인 노력보다 얻는 결과가 매우 적었다. 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쓰시마 국주를 이용하여 조선에 교섭을 청하였는데, 그들은 명나라와 사대외교를 하고 싶어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에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응대와 더불어 일본내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고자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그리고 허성을 서장관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히데요시의 답서에는 정명가도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통신사와 부사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서인을 대표하였던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유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반면에 동인을 대표하였던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성마저 황윤길의 명견을 옹호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서 백성이 동요하면 자신이 향유하던 권력에 초래될 변화를 두려워했던 동인이 주도권을 주도하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다. 그러나 류성룡은 김성일을 두둔하고자 하였는지, 그의 저서 징비록에 밝히기를, 김성일 역시 일본의 침략의지를 간파하였으나, 괜한 말로 조정과 신민을 동요케하고 싶지 않았음으로 거짓으로 임금께 보고하였고 통신사 황윤길을 꾸짖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두 대신의 극명하게 달랐던 주장과는 상관없이 조선의 조정은 왜적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서둘렀다. 군사력 조선 조정은 김수ᆞ이광ᆞ윤선각 등에게 명령을 내려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고, 성 터를 수축하게 하였으며, 신립과 이일로 하여금 변방을 순시케 하며 영남지방을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방비하고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커다란 성과가 없었다. 더불어 선조는 직접 이순신과 원균을 각각 좌수사와 우수사에 임명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 배치하였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란 3개월 전 부임하여 전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보다 앞서 한해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던 이순신만이 제대로 전쟁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조선의 수군은 삼국시대부터 끊임없이 쳐들어 오는 일본의 해적집단 왜구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점점 강해졌기에 임진왜란을 16세기 최강의 육군과 최강의 수군이 싸운 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과 병농일치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에게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때 정남은 정병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두 가지 종류의 병역이 있었다. . 이 원칙을 전제하여 군은 중앙군인 경군과 지방군인 향군으로 대분하여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에서 세조 초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개혁을 거쳐 5위 체제,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던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고급관료의 자제들로 편성되었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 진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과 북방 변경에서 근무했으므로 내륙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아서 병력이 부재한 문제를 타개하고자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과 수영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처 요충지에 거진, 진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려고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현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상 환경이 급변하면서 근 1백여 년간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는 진관 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장점이 있는데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사람에게 지휘받아야 하는 시간상 문제가 있었으며, 최전방을 대상으로 하는 과도한 병력 집중 탓에 후방이 공백화할 취약점이 있었다. 이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이 소규모로 노략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므로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됐다. 전란 직전 조선은 건국 후 200년 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 일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여진족과 분쟁이 빈번한 북부 지방과 남부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특히 기병은 상비군으로서 많은 경험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보병은 병력의 질이 형편없었다. 전쟁의 징후가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 면에서 군비를 강화하고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팠지만, 특히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은 이전 수백 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에게 명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면서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하였다. 대외관계 조선은 조선 초부터 사대교린정책을 수립하여 명과는 사대하고 여진과 왜에는 교린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허나 조선의 역사상 유래 없는 평화로 군사력이 약해진 결과 교린 정책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일본 조일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일 관계입니다. 조선은 일본과 하는 외교를 기본으로 교린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에 번번이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을 침범하여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 시대 와서는 수군력을 강화하고자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을 양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진력하였다.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14세기 말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난보쿠초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 영주 세력을 대상으로 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하자 지방에 할거한 봉건 영주인 슈고 다이묘들이 사분오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센고쿠 시대 개막 이 부분의 본문은 오닌의 난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센고쿠 시대입니다. 1467년의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로부터 100여 년간의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기에 지방 신흥 무사 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 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 다이묘로 등장하였다. 센고쿠 통일 과정 센고쿠 다이묘들은 난립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일본에 15세기 후반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하여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ᆞ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경쟁하는 세력 다수를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에 근거하는 지배권을 장악하여 통일하는 기운이 무르익어 갔으나 1582년 오다의 측근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살되는 혼노지의 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오다의 충복이었던 효웅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갔다. 하시바는 아케치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의 장손 산보시를 옹립하여 오다 정권을 장악, 센고쿠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하시바는 같은 오다 오대장 중 한명이자 오다 사천왕 중 필두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내부권력다툼을 종식시켰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 교통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터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의 차남 노부카쓰와 오다의 사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지금의 고마키산과 나가쿠테 시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도쿠가와가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하였고 이로써 후방을 안정시킨다. 1585년 조소카베 세력을 굴복시킨 시코쿠 정벌의 공으로 조정에서 관백에 임명되고 이후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일본 전국 지배권을 위임받고 강령으로서 전국의 평화라는 뜻의 ‘소부지’를 내걸었다. 1586년 태정대신에 임명,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이를 토대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게끔 했다. 1587년 명령에 불복하던 사쓰마 국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 오다와라 정벌로 관백 히데요시의 마지막 저항 가문 고호조 일가의 수장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를 쓰러뜨리고 도호쿠 지방의 다테 세력을 복속시키면서 전 일본을 통일하였다. 센고쿠 통일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도요토미는 관백위를 양자이자 조카 히데쓰구에게 물려주어 내정을 맡게 하고 본인은 태합에 올라섰고 천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히데요시는 1585년에 대륙 진출을 최초로 언급했고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고 명한 때는 이미 1587년 이었다. 정명가도 요청 히데요시는 1591년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를 이용해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이라는 주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만정제신은 명나라와 군신대의를 깰 수 없었고 교만한 마음에서 일본을 업신여겼던 데다가 과거 삼포 왜란을 겪었던 조선의 왕과 백관의 처지에서 일본이 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선선히 조선의 길만 빌린다는 실정도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일본이 한 요청을 거절하였다.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 성 전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곧 정치, 경제 개혁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은 토지제도 개혁인 검지와 무기 몰수 정책인 가타나가리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1591년 전 일본에 할거한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 일본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도쿠가와에게는 고의로 간토 지방의 황무지로 이봉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도쿠가와가 임진왜란에 불참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가타나가리는 농민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자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령’을 내려 신분상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 분리를 완성하였다. 예수회의 협조 의혹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일행은 사쓰마 국주 시마즈 다카히사의 환대를 받는다. 그 곳에서 1년여간의 선교활동을 한 후 1550년 스오 국주 오우치 요시타카를 만나다. 하비에르 신부는 요시타카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하고 교토에서 선교 허락을 받아낸다. 이후 일본에서 가톨릭 교세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등 순조로웠다. 1587년 전국을 평정한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교회 부지를 제공하고 선교를 적극 후원했다. 1589년 5월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 가스파르 코엘료를 불러 은근히 중국과 조선의 침공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그리고 만약 조선과 중국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 각지에 교회를 지어 선교사들을 협력하겠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때가 오면 포르투갈 군함 2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코엘료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기리시탄 영주들을 움직여 적극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예수회의 제안대로 고니시 유키나가 등 기리시탄 영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전방에서 앞장서서 조선군과 싸운다. 하지만 예수회의 제안은 반대로 화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기리시탄 영주들이 예수회 신부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경계하게 되고 1587년 6월 19일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가톨릭 예수회를 탄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히데요시의 가톨릭 금교령과 선교사 예수회추방령에 다급해진 예수회 신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예수회 신부의 자격이 아닌 인도총독의 사절 자격으로 1591년 3월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에게 황금장식을 붙인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밀라노산 백색 갑주 2벌, 모두 은으로 된 매우 훌륭한 장식이 붙은 커다란 검 두 자루, 진귀한 두 자루의 총포, 총포로 사용할 수 있는 투리사드 하나, 야전용 천막 한 세트, 대단히 훌륭한 유화, 괘포 4매, 아라비아산 말 두마리 등을 선물로 바쳤다. 이 선물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묵인했다. 이 때 히데요시와 예수회의 발리냐노간에 어떤 묵계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함과 동시에 예수회의 기리시탄 영주들은 전장에서 최선봉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임진왜란으로 일본 열도로 건너온 조선인들의 일부에게 가톨릭 전도를 하게 된다. 특히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 일본의 중국 공격 계획 역시 예수회 신부에 의해 작성되었다. 영국의 대중 역사 저술가이자 뉴욕타임즈 컬럼리스트를 역임한 폴 존슨은 그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 에서 예수회의 알폰소 산체스 신부가 중국 정복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 일본인들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폰소 산체스 신부의 계획은 매우 치밀하였는데 그의 계획서에는 유럽에서 1만~1만2000명의 군대가 파견되어야 하고, 마닐라와 일본에서 5~6000명의 원주민을 동원해야 하며, 주력부대는 마닐라에서 출발하고 마카오와 광저우에 머루르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이 협공을 해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계획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대항했던 바로 그 때에 구상되었는데, 유럽의 가톨릭교회와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지지하였다. 산체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인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협조할 것을 허가해 달라는 편지를 마닐라 주교에게 보냈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예수회와 스페인 관리들끼리 교환한 서신의 구체적 내용은 몰랐어도 이런 중국 침공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다. 의혹에 대한 반박 코엘로와 발리나뇨가 지원을 하겠다고 언급한 것 외에는, 예수회 혹은 가톨릭 교회 차원의 조선출병 지원이 실증적으로는 학인되지 않고 있으며,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레온 한칸 두 신부가 19개월간 조선에 왔었다는 기록 외에 나머지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불교 다이묘의 출병이 불교의 협조로는 해석될 수 없듯, 가톨릭 다이묘들의 출병 역시도 같은 원리로 가톨릭 혹은 예수회의 협조로 해석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히데요시는 예수회에게 포르투갈의 군함도 상선도 지원받지 못했음만이 확인되고 있다. 반면 예수회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인식이 확인된다. 발리냐노는 조선을 중국의 한 지방으로 인식하는지, ‘동쪽’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레스를 대문자로 명기하여 단순한 지방이 아니라 별개의 지방 혹은 나라로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상이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수마리오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발리냐노는 두 번째 일본 방문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모두 히데요시의 야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에 대해 발리냐노는 1592년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58)고 하였다. 발리냐노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저지른 너무도 부당하고 잔인한 전쟁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은 물론 바다와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일본인들 역시 육지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칼과 질병이 지나간 자리에 12년간의 박해가 또다시 일본교회를 위협했다고 보고했다.61) 예수회원들이 볼 때 일본의 조선 침략은 중국을 향한 명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냈고, 일본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컸던 사안이었다. 전쟁은 이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과 일본교회의 박해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전쟁은 결국 히데요시 개인과 그에게 동조하는 일부 권력자들의 야심을 위해 힘없는 이웃 국가를 친 황당한 전쟁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63) 히데요시의 야심에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과 그의 변덕에 따라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은 것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58)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61) Alejandro Valignano S.J., Apologia de la Compania de Jesus de Japon y China , edicion por Jose Luis Alvarez-Taladriz, Osaka, 1998, p. 394. 63) Alejandro Valignano S.I., Adiciones del Sumario de Japon , in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 Editados por Jose Luis Alvarez-Taladriz, Tomo I, Sophia University, Tokyo 1954, pp. 487~488. —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 김혜경 종합하자면 코엘로와 발리냐노가 히데요시를 지원하겠다고 말해준 것과는 달리, 군종 신부 두명의 사목 외에는 그 어떤 구체적인 지원도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회의 비협조와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만이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알폰소 산체스의 1586년 계획서는, 유럽에서 1만-1만 2천, 마닐라 및 일본에서 5-6천을 동원하여 중국을 치자는 계획으로, 주력부대는 마닐라에서 출발하고 마카오와 광저우의 포르투갈인들이 협공을 하자는 내용으로, 임진왜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서신이다. 또한 이 계획서의 발신인은 일본인 지도자들이 아니였으며 그들은 구체적인 내용도 몰랐다. 그저 이러한 계획이 논의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파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즉 임진왜란과 산체스는 관계가 있는 인물이 아니며, 그마저도 산체스의 계획은 실현조차 되지 못하였다. 군사력 15세기 중엽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 양상이 대규모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하여 전투하는 주체도 특정한 영웅 소수가 아닌 보병이 밀집한 부대로 옮겨졌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경장비 보병인 아시가루가 출현하여 전투 승패를 가름하는 중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와 화약이 전래되면서 뎃포 부대인 뎃포쿠미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하는 주역을 맡았다. 당시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런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에 주도권을 장악한 무장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가쓰요리 군과 벌인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 변화에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타이쇼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 지휘관으로서 기사와 보사를 두었다. 이 무렵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이나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로 하는 공격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였다. 즉, 제1진인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인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사격하면서 돌격하고 이어서 제3진인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인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비전투 요원으로서는 전령 업무를 담당한 소인, 수송 업무를 맡은 하부, 순박 운항 업무를 수행하는 선두와 수주, 감찰 업무를 행하는 대목부, 의사, 승려 가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에 대규모 건조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조선 침공 직전에 전함 천여 척을 이미 확보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는 3천여 척이나 되는 대규모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고 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산요도, 산인도, 기나이와 그 동방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병력 33만을 동원할 준비하였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6년 전인 1586년에 일본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의 범선인 카락과 갤리온 구입을 시도했었는데 포르투갈인의 거절로 구입에는 결국 실패했다. 이 무렵 일본군은 뎃포, 창, 궁시, 일본도를 충비하고 있었으며, 주종 간 단결력이 막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으므로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명 명과 조선 간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으로 대표되는 가장 전형이 될 만한 군신관계였다. 명과 조선 간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을 둔 사대 관계를 토대로 조선이 명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 사이에는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로는 명 황제에 의거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 연호의 사용, 정기로 계속 하는 조공 등 제후로서 의무가 부과되었다. 명의 조선을 대상으로 한 내정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로 양국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노골로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을 대상으로 한 사대가 매우 당연시되면서 명과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스럽고 안정된 명과 조선의 군신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 국왕과 백관은 명과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과 교섭에 적극이었고 그로써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 체제하에 규정된 당초 조공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여 금과 은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그리 원활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에 조선 내부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명에서 생산된 견직물을 선망하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에서 비단과 원사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에서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사이좋은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를 놓고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조선은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군신 관계를 받아들였다. 명을 향한 사대 외교는 명을 대상으로 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보다 강국인 명을 대상으로 하여 왕의 권력 안정을 확보하려는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이면서 공무역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명의 정세 명의 정치 상황 대략 1575년 명나라 군대의 모습 1368년 개국된 명은 15세기 초 영락제 때에 국력이 막강해졌으나 영락제 사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1449년에 정통제가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의 국제상 영향력이 점차 약화하였고 내부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에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이에 명은 북방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방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양방에서 싸워야만 했으며, 이런 외부 압력은 자연히 국력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만력제가 등극하면서 10년간은 장거정을 비롯한 대정치가가 등장하여 다시 중흥하는 기회를 맞았으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국사를 돌보지 않고 정사를 환관에게 일임해 정치는 혼란에 다시 빠졌으며, 영하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 보바이의 반란과 귀주의 토관 양응룡의 난을 평정해야 했고 후에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고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명의 대외 관계 조명 관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 명은 1368년 건국 후 대내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은 주변에 여러 나라를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 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왕의 권력을 도모하고자 명의 조공·책봉 체제를 받아들였다. 명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 정책을 취한 명과 하는 무역은, 조선이 명에 조공하고 나서 그 대가로 사이 형식으로 하는 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소위 조공 무역은 명의 황제가 주변 국의 왕을 책봉하는 대가로서 해당 국은 조공으로써 명 황제에게 공녀를 위시해 공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에서 공녀와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에서는 그 대가로 조선 지배계급이 선망하는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 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양국 간 주장을 보면 드러난다. 명이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하는데 조선은 거꾸로 명에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공 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 일방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품을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회사품을 하사하는 게 원칙이었다. 회사품은 조공품보다 귀하고 많아야 하는 게 관례였고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 운반비를 명 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 체면을 유지하려는 방도였다. 명일 관계 평소 명은 일본 다이묘들이 하는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 번씩 조공하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고 패도하고 오면 구적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하는 장소는 절강성 영파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이유는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에서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데다가 일본 천황이 아니라 다이묘들의 배가 왔고 체류하는 경비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차 조공 인원을 300명으로 늘려 그런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하자 명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축출해서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게 후원받는 왜구의 활동이 극심해졌다. 왜구는 명과 조선을 주로 공격하였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무역을 이용해 명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로워 공식 무역로를 트려고 노력하며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히데요시도 정권을 장악한 후 명과 무역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군사력 명은 개국 초에 징병제와 모병제 장점을 절충한 군제인 위소제도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100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 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다. 각 총기는 소기 5명을 지휘하고 각 소기는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백호소 10개로서 천호소 1개를 구성하고 천호소 5개로서 1위를 구성한다. 유사시에는 위의 지휘관으로 참장, 유격장, 파총 등을 임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총병관이 이를 총괄 지휘하였으며, 1위의 병력 규모는 5,600이었다. 위 수 개가 모여서 군단 도지휘사사를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여러 도지휘사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에 분속하게 되어 있었다. 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둔전과 군사 훈련에 종사하면서 전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다가 전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하였다. 군단인 도지휘사사는 각 성이나 전략상 요지에 있었으므로 명 대에는 13성의 도지휘사와 요동, 만전, 대령 등의 도지휘사사를 비롯하여 관할구역이 광대한 지역에는 행도지휘사사를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기까지 명은 전국에 16개 도지휘사사, 5개 행도지휘사사, 2개 유수사를 두고 여기에 소속된 위 493개, 소 2,593개가 있었으며, 도사에게 직속된 소어천호소 315개가 있어 그 병력은 총 329만여에 달했다. 이 밖에도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 금오, 우림 등의 25위가 있어 그 병력 수가 15만여에 달했다. 명 군제의 근간인 위소제도의 경제 기반은 군둔이었고 그에 초기 세금 부과는 매우 경미하였으므로 위소제도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영락제 연간에 군둔 관리 체제를 정비하면서 둔전병 부담이 가중되어 군둔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1449년의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으로서 민병 모집을 이용해 병력을 보충했다. 이 민병은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상 혼란과 더불어 군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 전투력이 약화하여 역시 유명무실해졌다.이는 여진이 독립하여 후금을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경과 히데요시는 타국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과 권력 공고화를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을 억제하려고 명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592년 음력 1월 히데요시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명을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좋게 바꾸어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정명가도) 전쟁 초기 부산진 전투를 그린 부산진순절도 동래성 전투를 그린 동래부순절도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592년 5월 2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6월 3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6월 7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다.그러나 고니시 유키나카가 이끄는 병력도 많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그리고 조선이 자랑하던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진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였다. 일본군이 노도처럼 북진해 오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분노한 백성이 궁궐과 전적을 태워버렸다. 6월 11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고 6월 26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하고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7월 21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인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지만, 조선군은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전무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마련하였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리던 남부 지방에서는 심히 반발하였다. 결국, 병사들이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는 급보를 듣고 탈영하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일례로 일본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의 부하 포졸인 황옥현은 탈영하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참수당하기도 했으며, 대규모 총력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당시에는 전시 계획은 있었으나 그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예컨대 대구에는 전시 계획대로 군대가 소집되었어야 했으나 일본군의 고속 돌파로 말미암아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역에 일본군이 진입하였고 백성과 수령도 뿔뿔이 도망친 뒤라서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급조한 대구읍성은 방어에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고 이일은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지도 못하고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하기도 전에 패해서 도망쳤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에 사신을 지속으로 보내어 구원을 계속하여 청하였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태워 버리고 노비는 자신의 문적을 알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을 수비하라고 시켰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에서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각지에서는 백성이 저항했다. 고려의 현종, 고종, 공민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불리한 형편을 타개했으므로 조선 백성은 별로 충격받지 않았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했고 백성이 정복자에 대항하는 실정에도 충격받았다. 일본에서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를 이전하는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으로서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차이를 모른 채 정복한 조선에서 보급과 급료 등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으므로 일본군의 기본 계획에 큰 차질을 빚는다. 어가의 도주 조선 선조 의주파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정부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에 임명하고, 이전과 변언수를 수성좌위장과 경성우위장에, 신각을, 중위대장에, 박충간을 경성순검사에 임명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선조는 한편으로 징병대를 구성해 징병 체찰사에 이원익과 최흥원을 임명하고 징병대를 전국에 보내 15~60세 남성을 징집하게 했다. 송상현, 정발 등이 전사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도원수 신립과 부원수 김여물이 이끄는 토벌대 1만 6천명이 몰살당하고 4월 말 일본군은 경기도로 들어왔다. 이에 선조는 파천, 천도를 결정한다. 이후 일본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 오자, 선조와 백관 일행은 또다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하고, 바로 조정에서는 파천을 논의하였다. 바로 정사가 소집되고 대신들은 모두 파천을 반대하였다. 이날 영의정 이산해는 혼자 울며 통곡하다가 정사가 끝난 뒤 승지 신잡에게 과거에도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며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이산해를 비난했다. 혼란에 빠진 선조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에 가서 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어려운 상태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한다면서 중국과 가까운 의주 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우부승지 신잡, 주서 조존세, 가주서 김의원, 봉교 이광정, 검열 김선여 등을 만나 파천을 선언한다.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는데,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 도착하여 임명한다. 한편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는가 하면 4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은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이에 선조는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었고 4월 30일 궁인들을 소집한 선조는 궐문을 나섰다. 한양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선조와 백관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고 나루터를 방해하고 배 여러 척을 침몰시켰다. 선조와 백관 일행은 일본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도망쳤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당시 선조는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2년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사신을 보내 6월 27일 망명 허락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선조는 이런 굴욕 속에서 몽진에 성공하였다. 도성의 사대부들의 계속된 환도 요청과 사헌부와 사간원이 여러 번 선조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 1593년 9월 21일에 출발하여 10월 3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로 피신, 망명정부를 세울 것도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1593년 8월 의주에서 몇차례 남하하여 평양성을 거쳐서 해주까지 왔다가 다시 의주 근처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였다. 1593년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선조는 갈팡질팡하다가 1593년 9월 22일 해주를 출발, 9월 23일 연안부에 도착, 2일간 머무르자는 비변사의 건의로 4일간 머무르다가 9월 27일 개성, 9월 28일 파주 동파역을 거쳐 9월 29일 고양 벽제관을 거쳐 10월 1일 벽제관을 출발, 한성부 정릉동 행궁에 나타났다. 조선군의 반격 함경도를 수복하는 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 묘사한 수조병풍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였고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로 하는 관직 제수와 우대는 기존 무과 급제를 이용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을 일으켰는데 이런 알력이 첨예화하여 폭발한 것 중 하나가 김덕령 사건이다. 한편으로 공명첩으로써 군량미를 모으고 근왕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 사대부와 백성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려고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에 명나라 장군들도 광해군을 극찬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상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와 함께 조선에 파병돼 일본군과 싸운 포르투갈 용병들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선진화된 문물을 갖춘 용병을 '해귀'라 불렀다. 명나라가 고용한 포르투갈의 용병들이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하고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하고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 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과 길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중 휴정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그 사람의 제자 유정의 내원을 얻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그 사람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군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방어하여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군을 주춤하게 하였고 일본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였으며, 많은 인구가 사는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전라 수영이 육지에서 일본군의 내습 걱정 없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승전의 뒷 배경에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과 급습 말고도 총통이라는 훨씬 더 강력한 화력병기 및 안정적인 판옥선에 더해 거북선이라는 새로운 전투함이 조합된 '발전되고 강력한 무기체계'의 전력화이다. 명군의 개입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한편,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간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 석성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 때 명은 일본의 의도가 명 정벌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몇 해 전 조선의 역관이 명나라 여자를 홍등가에서 구한 적이 있었고 그 여자가 나중에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조선의 곤란을 듣고 부인이 석성을 설득해 조선에 명군이 파병되었다는 일화도 전래한다. 조선의 거유인 성호 이익은 저서에서 임진왜란의 최고 공신은 석성이라고 평가했다. 요양부총병 조승훈은 병사 5천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송응창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에 파병한 3천여 명을 시작으로 종전할 무렵에는 10만여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명군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지만, 명나라가 개입하여 전쟁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고 평가된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오합지졸 병력 17만 5천을 모았고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하곤 하였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한때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방어하던 곳으로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방어하였다. 행주대첩은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승병을 비롯한 병사들의 용맹한 활약과 화차의 활약이 매우 컸다. 특히 이 공성전에서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부상을 입었다. 행주산성 방어전은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이다. 강화 회담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9일간 치열하게 전투한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을 전사시키고 성을 함락하였으나 일본군도 피해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이로써 전란 내내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보전되었다. 전라도는 최대의 곡창지대이며 인구가 많아 반격의 발판으로 중요했다. 또한, 일본군이 육로를 통해 전라 수영, 즉 이순신의 해군기지의 곧바로 진격하여 육지를 통해 배후를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이순신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적었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2차 침입과 종전 이 부분의 본문은 정유재란입니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히 하려고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로 말미암아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 9월 2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후에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직산을 끝으로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죽자 일본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으로 철수에는 성공하여 임진왜란은 종전하였다. 대중문화 속의 임진왜란 대한민국의 경우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상세히 묘사를 하지만, 일본의 경우 자신들이 패배한 전쟁이기 때문에 최대한 간단하게 다루려고만 하며 별로 대중문화로 창작하려는 모습이 없다. 한국 입장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일본군이 조선에 침략하여 약탈과 학살을 벌이는 장면, 대규모 해전 등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묘사되었다. 《조선왕조오백년》〈임진왜란〉 편은 1991년 10월부터 일본 NHK를 통해 방영되었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전쟁과 외교가 병행된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 《천군》에서는 이순신의 활약 보다는 인간적 내면을 더 비중있게 다루었다. 영화 《명량》에서는 임진왜란 중 제 2차 침략의 명량대첩을 다루었다. 2015년 방영된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류성룡 선생이 집필한 '징비록'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시기에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 입장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이 원의 일본 원정 에 비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어진다.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 히데요시가 출병을 명령하는 단 한컷만으로 임진왜란을 묘사하였다. 이는 그 이전, 그 이후의 작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대하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의외로 히데요시 말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쟁으로 그려진다. 히데요시는 전 주군 《오다 노부나가》 영향을 받아 계획만 있던 중, 어렵게 얻은 친아들이 병사해 그 슬픔을 잊고자 갑자기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곧 또다른 아들인 히데요리가 출생하고 승전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활약과 명나라 참전으로 전황이 고착되고 자신에게 병이 찾아오자 아들과 조선침략에 대해 많은 집착과 근심을 보인다. 결국 히데요시 죽음으로 전쟁은 급하게 종결되고, 무리를 둔 조선침략은 이후 다이묘간 분쟁,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두, 《세키가하라 전투》를 가져와 그의 일본통일을 붕괴시킨다. 소설 속에서 상당히 미화된 측면이 있으나 어쨌든 이에야스는 조선과 전쟁을 되풀이 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선조》와 《이순신》, 《울산성 전투》, 《노량해전》이 서술되어 있다. 당시 사용된 무기 조선 현자총통 지자총통 비격진천뢰 차대전 화차 천자총통 수노기 장군전 팔각총통 변이중화차 편전 화차 일본 가마야리 나이카마 시케토우 유미 시호다케 유미 일본도 종자도총 - 유럽 화승총인 아르카부스의 일본판 양국 주력함 비교 조선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조선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평평한 전함이며 일본의 전함보다 내구력이 뛰어났다. 거북선 판옥선 위에 판자를 덮어 방어체계를 갖춘것 외에는 판옥선과 동일하다. 한때 위인전기 등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였다. 거북선은 다른 전함에 비해 고도의 기동성이 요구되었다. 판옥선 조선의 주력 전함으로, 함선 위에 판자로 만든 집이 있다고 하여 판옥선이라 불렸다. 협선 정찰과 연락용도로 사용한던 함선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각 수군 항구에서는 판옥선과 협선을 1:1비율로 보유하는 것이 규정사항이었다. 다른 함선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일본 일본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뾰족하며 배 위에 집 모양의 누각을 세웠다. 대체로 조선의 전함에 비해 크기가 작고 내구력이 약했다.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바야 기타 한편 임진왜란 전의 정세보고를 한 황윤길과 김성일의 문제가 1945년 해방 직후에까지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황윤길의 집안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이 학봉 김성일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점이 2000년대에 와서 알려지면서 논란거리가 된다. 현대에 들어와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현대 한국사학사에 있어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유발한 전화의 책임자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논지를 띤 최초의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족손인 황의돈이었다. 해방 후 동국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제1세대 학자인 황의돈은 신편 조선 역사 128~129쪽에서 류성룡,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게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두고 신복룡은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며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 며 안타까워했다. 주요 인물 굵은 글씨는 각 국의 지도자. 칼표가 붙은 인물은 전쟁 중 사망한 인물. 조선 강찬 강항 계월향 고경명 † 고인후 † 고종후 † 고언백 곽재우 곽재기 곽준 † 곽흘 광해군 권율 권응수 권준 권종 † 김경로 † 김덕령 † 김명원 김성일 † 김시민 † 김억추 김면 † 김여물 † 김연광 김완 김개국 김응남 김응서 김응함 김제갑 † 김천일 † 김충선 김희철 † 나대용 민정붕 박의장 박진 박홍 † 배설 배흥립 백광언 † 백사림 변이중 사명대사 서산대사 서예원 † 조경 선거이 † 성혼 손인갑 † 신성군 신호 † 심대 선조 송대립 송상현 † 송언신 송유진 송희립 순화군 신각 † 신립 † 신점 안위 양대박 † 여여문 † 영규 † 오억령 오응정 우배선 우치적 우복룡 원균 † 원사웅 원호 † 유극량 류성룡 류숭인 류종개 † 윤경원 † 윤근수 윤두수 윤탁연 † 이각 이경록 이광악 이덕형 이몽학 † 이복남 이산해 이성임 이순신 † 이순신 이시언 † 이억기 † 이영남 † 이운룡 이원익 이일 이장손 이전 이정암 이항복 이헌국 임중량 임해군 임현 † 정걸 정경세 정기룡 정기원 † 정담 † 정득열 정문부 정발 † 정세아 정운 † 정원군 정인홍 정평구 정철 † 정탁 정희적 진대유 조헌 † 조종도 † 최강 처영 최경회 † 최호 † 하원군 한극함 한호 한효순 한응인 허성 허준 한명련 황박 황윤길 황진 † 명 동일원 두사충 등자룡 † 마귀 만세덕 모문룡 사대수 석성 설반 송응창 숭정제 심유경 † 양소훈 양방형 양원 양호 오유충 오종도 유정 이령 이방춘 이여송 이여백 이유승 † 이종성 임세록 장보지 장세작 장표† 조승훈 전세정 진린 진유격 천만리 팽신고 황응양 해동삼국도 일본 가토 기요마사 가토 미쓰야스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우마노조 구쓰키 모토쓰나 게야무라 로쿠스케 †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요시타카 구루시마 미치후사 † 구키 요시타카 기무라 시게지 깃카와 히로이에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카가와 히데마사 다니 모리토모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야스히로 다테 마사무네 도도 다카토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이 미치유키 † 마나베 사마노조 마시타 나가모리 마에노 나가야스 모리 가쓰노부 모리 데루모토 무라카미 가게치카 미야베 나가후사 벳쇼 요시하루 삿사 마사모토 소 요시토시 시마즈 요시히로 아리마 하루노부 아사노 요시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오타니 요시쓰구 오토모 요시무네 와타나베 시치우에몬 와키자카 사베에 와키자카 야스하루 요시미 모토요리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이코마 지카마사 이토 스케타카/스케타케 조소카베 모토치카 도다 가즈타카 하세가와 히데카즈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가오카 다다오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같이 보기 임진왜란 해전 목록 임진왜란 전투 목록 만력삼대정 대마도 정벌 거북선 판옥선 남왜북로 왜성 귀무덤 의주파천 호랑이 문화재 반환 항왜와 순왜 임진왜란 군대 목록 월하의 침략자 병자호란 간양록 징비록 연려실기술 양부하 피로인 왜관 왕직 " title="zh:汪直 ">zh:汪直 ) 대항해시대 철포전래 포르투갈의 발견 일본-포르투갈의 관계 예수회 일본의 기독교 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기리시탄 다이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가스파 빌레라 -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대신에 원래 조선에 오기로 했던 신부 해귀 - 명나라 군대가 데려온 포르투갈 용병 사세용 - 조선에 온 명나라 첩보원 빈센트 권 -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후 조선인 최초로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 나에시로가와 다마야마 신사 - 가고시마현 히오키 시에 있는 단군을 모셨던 신사 데지마 난학 정유재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는 작품 PC 게임 임진록 임진록 2 충무공전 충무공전 2: 난세영웅편 각주 ↑ Turnbull, Stephen. 2002, pp. 140. ↑ Turnbull, Stephen. 2002, pp. 221. ↑ Turnbull, Stephen. 2002, pp. 230. ↑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 『일본사』55장, 루이스 프로이스, 1583년 ~ 1597년 사이에 일본에서 집필. ↑ 조선왕조실록 ↑ 갤리온 ↑ 아사오 나오히로「체계일본의 역사8 천하일통」소학관 ↑ Rockstein, Edward D., Ph.D. pp. 38 ↑ 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 일본 선교의 부흥과 쇠퇴의 요인 분석을 통한 적절한 일본 선교 전략의 모색》 ↑ 총포이지만 무엇인지 확실치 않음 ↑ 루이스 프로이스《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P80 ↑ “예수회가 임진왜란 배후세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5년 10월 28일. ↑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 ↑ Juan Ruiz de Medina S.I., Metodo misionales para la evangelizacion de Corea, in A Companhia de Jesus e a Missionacao no Oriente, Actas do coloquio internacional promovido pela fundacao oriente e pela revista broteria Lisboa, 21 a 23 de abril de 1997, Lisboa, 2000, p. 149.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64670&cid=50762&categoryId=51340 ↑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 ↑ 부대 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지휘관 다이묘가 가톨릭 신도일 때에 해당되었다. 일례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서 성직자로서 업무를 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 이상윤 . 《기술,배,정치-기술배정치는 세계패권을 어떻게 바꿨는가?》. 높은새, 297쪽. ISBN 978-89-93989-02-1 ↑ 《글로벌세계대백과》, 〈임진왜란〉, 임진왜란〔槪說〕. ↑ 『조선왕조실록』, 『난중잡록』 ↑ 유성룡, 《징비록》 42페이지 ↑ 이남희, 《클릭 조선왕조실록》 25페이지 ↑ 호남연합의병 주역 유팽로를 만나다, 한국일보, 2012년 6월 13일 ↑ 이한우 차장 대우, "호남땅마저 함락되면 조선은 망한다" Archived 2014년 3월 18일 - 웨이백 머신, 《주간조선》, 2006년 11월 18일 ↑ 宣祖 96卷, 31年 26年) 1月 10日 3번째기사 접반사 윤형, 충청 절도사 이시언이 적과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다 ↑ 宣祖 96卷, 31年 26年) 1月 16日 2번째기사 이시언•성윤문이 적과 한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 宣祖 96卷, 31年 26年) 1月 16日 3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2日 6번째 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명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2日 3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0日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8日 7번째 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0日 6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명군의 퇴각을 다룬 치계를 올리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6日 3번째 기사 동 제독이 전투에 관한 게첩을 올리다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7日 1번째기사 감찰 어사 진효의 일본군과 한 전투에 관한 제본 ↑ 宣祖 105卷, 31年 26年) 10月 12日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 「조선왕조5백년—임진왜란」日서 방영, 《동아일보》, 1991.10.04 ↑ 자신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비록 가마쿠라 막부의 약화를 가져왔지만 일단 승리한 전쟁 ↑ 가 나 다 라 신복룡, 《한국사 다시보기》 128페이지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title="카카오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임진왜란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연표 vdeh한반도 국가와 일본열도 국가 사이의 분쟁고대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백강 전투 신라정토계획 중세 전기 왜구 대마도 정벌 근세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 정해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 근현대 운요호 사건 항일의병운동 임정의 대일선전포고 독도의용수비대 vdeh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임진왜란1592년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 ~ 4월 28일 상주 전투 : 4월 25일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한강 전투 : 5월 2일 옥포 해전 : 5월 7일 합포 해전 : 5월 7일 적진포 해전 : 5월 8일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기강 전투 : 5월 18일 사천 해전 : 5월 29일 당포 해전 : 6월 2일 당항포 해전 : 6월 5일 용인 전투 : 6월 5일 무계 전투 : 6월 6일 율포 해전 : 6월 6일 정암진 전투 : 6월 8일 여주 전투 : 6월 10일 제1차 평양성 전투 : 6월 15일 웅치 전투 : 7월 7일 이치 전투 : 7월 8일 한산도 대첩 : 7월 8일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제2차 평양성 전투, 해정창 전투 : 7월 17일 영천성 전투 : 7월 24일 ~ 7월 27일 지례 전투 : 7월 29일 제3차 평양성 전투 : 8월 1일 청주 전투 : 8월 1일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다대포 해전 : 9월 1일 서평도 해전 : 9월 1일 절영도 해전 : 9월 1일 초량목 해전 : 9월 1일 부산포 해전 : 9월 1일 연안 전투 : 9월 2일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 ~ 1593년 1월 28일 창원 전투 : 9월 27일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제4차 평양성 전투 : 1월 9일 성주 전투 : 1월 15일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웅포 해전 : 2월 10일 ~ 3월 6일 행주대첩 : 2월 12일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송유진의 난 : 1월 11일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휴전기1595년1596년 이몽학의 난 : 7월 6일 정유재란1597년 기문포 해전 : 3월 9일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고령 전투 : 8월 15일 남원 전투 :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직산 전투 : 9월 7일 벽파진 해전 : 9월 7일 명량 해전 : 9월 16일 석주관 전투 9월 22일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사로병진책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왜교성 전투 : 9월 20일 ~ 10월 7일 노량 해전 : 11월 19일 남해왜성 소탕전 : 11월 21일 vdeh명나라통사 홍건적의 난 명의 운남 정복 명의 나하추 정벌 부이르 호 전투 정난의 변 정화의 원정 명-투루판 분쟁 명-호 전쟁 명-코테 전쟁 람손 봉기 영락제의 몽골 원정 인선지치 룽촨-핑민 전쟁 토목의 변 조석의 난 묘족 반란 안화왕의 난 녕왕의 난 말레이-포르투갈 전쟁 견명사 닝보의 난 대례의 의 가정 대왜구 일조편법 만력삼대정 영하의 역 만력동정 귀주의 역 동림당 명말삼안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 명-네덜란드 분쟁 갑신의 변 명청 전쟁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산해관 전투 이자성의 난 남명 행정 및 군사 황제 목록 가계도 내각대학사 동창 종인부 흠차대신 순무 명의 군사 정복 명 치하 만주 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구진 신궤영 금의위 문헌사 원사 백자찬 황명조훈 영락대전 대명회전 명실록 포르투갈-명 협약 장소 자금성 조천궁 명효릉 명조릉 명십삼릉 명·청의 황릉 사회문화사 명나라의 시문학 명나라의 회화 명사가 오문화파 절파 영저사비 명나라의 경제 명나라와 타이 명나라의 이슬람교 기타 강서 주씨 명사 사모 명장성 명-티베트 관계 왜구 « 원나라 청나라 » 1368년–1644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임진왜란&oldid=24637900" 분류: 임진왜란1592년 분쟁1593년 분쟁1594년 분쟁일본-한국 관계반일 감정도요토미정권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09년 10월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8일 15: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클로드 드뷔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클로드 드뷔시 클로드 아실 드뷔시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다, 피아노 전주곡, 영상 1, 2집, 어린이 차지,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베르가마스크>중 달빛 등이 있다.
목차 1 생애 2 작품 2.1 장르별 목록 2.1.1 오페라 2.1.2 관현악곡 2.1.3 발레 2.1.4 협주곡 2.1.5 실내악 2.1.6 피아노 2.1.7 가곡 2.1.8 합창 3 음악 듣기 3.1 일반 참고 문헌 4 읽을거리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 1885년 드뷔시가 로마에 있는 메디치 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중앙에 흰 상의을 입고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생 제르망-앙-레에서 다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루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레슨비는 그의 아주머니가 지불했었다. 1871년에 수줍고 겁많은 소년 드뷔시는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 부인에게 주목받았다. 자신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덕분에, 1872년 11살의 나이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872년부터 1884년까지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기로과 함께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러시아 음악과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883년, 칸타타 《전투사》로 로마 대상 2등상을, 이듬해인 1884년, 역시 칸타타 형식의 《탕자》로 1등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이후 1887년, 말라르메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이때 상징파 시인 및 인상파 화가와의 접촉에 의해 차츰 인상주의 음악에의 의식이 깊어졌다.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그의 인상파풍의 작품 경향은 확정되었다.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는 반 바그너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1899년 10월 19일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했지만 1904년 엠마 바르닥과 사랑에 빠져 아내를 버리고 엠마 바르닥과 결혼하였다. 이후 드뷔시와 엠마 바르닥 사이에서 딸 클로드-엠마가 태어나게 된다. 드뷔시는 1908년 딸인 클로드-엠마에게 피아노 소품인 어린이 차지를 헌정한다. 제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3월 25일 오후 10시, 독일군의 폭격이 한창인 시기에 드뷔시는 파리에서 10년 동안 고통 받아왔던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3월 28일에 거행되었고 페르 라제즈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지금의 파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작품 이 부분의 본문은 클로드 드뷔시 작품 목록입니다. 장르별 목록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라장드 관현악곡 교향곡 나단조 교향 모음곡 '봄'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야상곡 교향시 바다 리어 왕 관현악을 위한 영상 발레 유희 장난감 상자 협주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간주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알토색소폰과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제1광시곡 실내악 피아노 3중주 사장조 현악 4중주 사단조 독주 플루트를 위한 시링크스 첼로소나타 라단조 플루트·비올라·하프를 위한 소나타 바장조 바이올린소나타 사단조 피아노 작은 모음곡 2개의 아라베스크 낭만적 왈츠 꿈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판화 기쁨의 섬 영상Ⅰ&Ⅱ 어린이 차지 전주곡Ⅰ&Ⅱ : 흑과 백 연습곡 비가 가곡 보들레르의 5개의 시 별의 밤 아름다운 저녁 잊힌 노래 말라르메의 3개의 시 합창 칸타타 방탕한 아들 선택된 여자 음악 듣기 Dieu qu'il l'a fait bon regarder Quant j'ai ouy le tambourin "내가 탬버린 소리를 들었을 때" Mazurka "마주르카" 재생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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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커피:: 커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gBreakFrames":!1 "wgULSCurrentAutonym":"한국어" "mediawiki.searchSuggest" 커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커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커피 로스팅 된 원두 커피( 음차: 목차 1 재배 지역 2 어원 3 역사 4 커피 작물 5 추출 방식에 따른 커피 분류 5.1 드립 커피 5.2 콜드 브루 5.3 추출 커피 6 바리에이션 커피 7 커피와 사회 8 커피관련 직업 9 카페인 10 주요 국가별 생산량 11 소비량 12 흥밋거리 13 효능 14 부작용 15 각주 16 같이 보기 17 외부 링크 재배 지역 커피콩은 주로 적도지방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남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70여개국에서 재배되는 커피나무에서 얻을 수 있다. 녹색 커피콩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교역되는 농산물 중의 하나이다. 커피는 그 카페인 성분으로 인해 사람을 각성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료 중의 하나이다. 1년에 세계적으로 약 6천억 잔이 소비된다. 커피는 많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커피의 기운을 북돋우는 효과는 에티오피아 동북부 지방에서 발견된 것으로 생각되며, 커피의 재배는 아랍으로 처음 전파되었다. 커피의 음용에 대한 최초의 믿을 수 있는 증거는 15세기 중반,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의 수피즘 사원에서 발견되었다. 커피는 무슬림 세계로부터 인도, 이탈리아, 그리고 나머지 유럽으로, 인도네시아, 미주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남 아프리카와 예멘에서, 커피는 종교의식에 사용되었고, 그 결과,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세속적인 소비를 금지하였고, 금지령은 에티오피아 메네릭 2세 때까지 유지되었다. 커피는 오토만 제국 터키에서 17세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었고, 유럽에서는 반체제적 정지 활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어원 "커피"라는 단어는 커피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의 남서부 “카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커피의 아랍어 명칭 까후와에서 유래되어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아랍어의 까후와는 '배고픔을 줄이다'라는 의미의 '까히야'의 변화형으로, 원래 와인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와인과 유사한 각성효과가 있는 커피에도 붙혀졌다고 한다. 아랍어 까후와는 오스만 투르크어 kahve로 흘러 들어갔고, 거기서 유럽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차입해 갔다. 한국어 단어 "커피"는 영어 coffee에서 온 말이다. 한자로 가배라고 쓰고, 가비다라고 하거나, 빛깔과 맛이 탕약과 비슷하다 하여 서양에서 들어온 탕이라는 뜻으로 양탕국 등으로 불렸다. 한편, 커피가 발견된 에티오피아에서는 "분나"라고 부른다.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는 표현 "coffee break"은 1952년에 처음 발견된다. '커피포트'라는 용어는 1705년에 등장한다. 역사 커피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커피는 늦어도 9세기부터 에티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염소 목동이었던 칼디가 우연히 염소들이 먹던 열매를 발견했고 열매를 마을에 가져오면서 피곤함을 덜어주는 커피의 효능을 마을의 종교 수행자들을 돕기 위해 쓰이게 됐다고 전한다. 그곳에서부터 커피는 이집트와 예멘으로 전파되었다. 이집트와 예멘에서는 커피가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 15세기 쯤에는 페르시아, 터키와 북아프리카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커피에 대한 처음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511년에는 신경을 자극하는 성질 때문에 메카의 보수적인 이맘에 의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 음료의 인기, 특히 그리스인과 지식인 사이에서의 인기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오스만 투르크 술탄 셀림 1세에 의해 커피 금지령이 폐지되었다. 카이로에서도 비슷한 금지령이 1532년에 세워졌고, 커피샵과 커피 창고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후 1554년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커피 가게인 카페 키바 한이 들어서게 된다.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서 유럽으로 퍼졌다. 한 계기는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하면서부터인데 전쟁 상태에서 터키에 머물고 있던 공직자 프란츠 콜스키츠키는 검은 빛깔의 열매를 발견해 들여오게 됐고 1683년에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지금처럼 커피에 우유를 넣거나 달게 먹는 방식은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커피는 후에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커피를 처음 대량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상인이었다. 네덜란드 인들은 자와 섬 지역에 커피 플랜테이션 농장을 지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0년 동안 중동을 여행한 독일의 의사 레오나르드 라우볼프는 1538년에 커피에 대해 "잉크처럼 검은 음료, 다양한 병, 특히 위에 관련된 질환을 치료하는 데 유용. 이것의 섭취자들은 아침에 돌려쓰는 도자기 잔에서 한 잔씩 마심. 이것은 물과 분누라는 관목에서 나는 열매로 만들어 짐"이라고 적었다. 쉴레이만 아아'로 부름)가 1669년 7월 메흐메트 4세의 사절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를 접견할 때, 투르크식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선보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상류층에게는 커피를 담당하는 하인을 고용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런던에서는 오스트리아보다도 먼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런던 사람들에게 커피숍은 Penny Universities라 불리면서 싼 값에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장으로 자리잡았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커피의 인기가 계속 증대됨에 따라 1690년대부터는 미국에도 본격적인 커피 가게 붐이 일어난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시작됐으며 1700년이 넘어가면서부터 뉴욕 시에서는 맥주보다 커피가 아침 음료로 선호받게 된다. 사실 커피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식민지 이주자들은 커피보다 술을 더 즐겨 마셨기 때문에 커피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 중 커피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여, 그러지 않아도 영국 상인의 부재로 공급이 줄어든 커피는 값이 크게 뛰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커피 산업 전반에 급진적인 발전이 나타난다. 1900년 힐스 브라더스 사가 진공 포장된 커피 제조에 성공했으며 이듬해에는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이던 사토리 카토가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했다. 1938년도에는 네슬레 사 소속 과학자들이 에스프레소 커피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1946년에는 아킬레스 가기아가 에스프레소 제조기계 발명에 성공하였다. 커피 열매. 한국에서의 커피 역사는 대략 189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에 외국의 문물이 많이 들어오던 시기여서 이때 커피가 전파되었다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공식문헌상으로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을 때 러시아 공사가 커피를 권했다고 나타나있다. 이렇게 커피를 즐기게 된 고종은 환궁 후에도 커피를 즐겨마시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무렵 서울 중구 정동에 손탁호텔이라는 곳이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커피하우스였다. 또 이무렵 일본을 통해서도 커피가 전파되었는데 일본인들이 차린 양식찻집에 의해서 커피가 전파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시절 근대적 의미의 다방이 많이 생겨 일본인들이 주로 찾고 몇몇 지식인들과 문학가들이 폭넓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방은 세계2차대전 전후로 하여 대부분 문을 닫았다가 해방과 동시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군용식량에 포함되어있던 인스턴트커피는 우리나라 커피문화 발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 후 커피믹스가 개발되고, 자판기가 등장하는 등 커피의 대중화를 이루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원두커피 전문점이 등장하고 1999년에는 스타벅스가 국내에 진출하여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연것을 기점으로 국내 에스프레소 커피전문점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 이후 더 많은 커피전문점이 들어서면서 커피빈, 파스쿠치, 엔젤리너스, 할리스, 이디야커피, 탐앤탐스 등의 업체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이루게 되었다. 폭발적인 커피 전문점의 증가로, 현재 서울은 전세계 도시중에서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커피 작물 커피는 꼭두서니과 코페아속에 속한다.커피는 크게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그리고 리베리카 품종으로 나뉘는데 그 중 아라비카는 전 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향기와 맛이 좋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로부스타는 카페인 함유량이 아라비카 종보다는 다소 높다. 리베리카는 수확량도 부족하여 앞선 두 개의 품종보다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아라비카의 종류로는 나뭇잎 끝 부분이 구릿빛을 띠고 생두의 모양은 가늘고 끝이 뾰족한 타이피카, 타이피카와 함께 2대 재배품종으로 알려진 버번, 버번의 돌연변이종인 카투라, 자메이카에서 가장 많이 자라나고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가장 잘 자라는 블루마운틴,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의 혼종으로 개량된 카티모르가 있고 그 외에는 카투아이, 마라고지페, 티모르 등이 있다. 커피 재배에서 위도는 남북위 20°이내가 최적의 위치여서 이 지역 내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커피 나무의 생장 속도가 느려 열매를 맺기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늦다. 또한 일반적으로 해발이 높은 고산 지역일수록 커피 열매의 크기가 보다 커진다. 그리고 꽃눈의 분화, 개화, 수분을 위해서 약 3달 정도의 약간 건조한 기후가 필요하다. 강수량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수확량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보다 건조한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수확량이 많다. 커피 나무는 나무 높이가가 3~4.5미터 정도까지 도달하며 관목으로 상록성이다. 잎은 서로 마주보고 나며 긴 타원형 또는 긴 타원상 난형으로 잎 길이는 7.5~15cm, 폭이 약 2.5~5cm로 끝이 뾰족하고 잎가에는 거치가 없으며 물결 모양이다. 잎 표면의 색은 녹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뒷면은 연녹색이 난다. 꽃은 엽액에 1~5송이가 방상으로 배열되며 순백색에 향기가 있고 별 모양으로 5갈래로 갈라진 열편은 길이가 2cm가량이다. 커피 아라비카 계열의 품종은 잎이 좁고 적으며 잎가의 물결 모양 역시 로부스타보다 작다. 커피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잎의 크기와 물결 모양을 비교하는 것이다. 성숙한 커피 로부스타 나무의 잎은 성인 남자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잎가의 선명한 물결 모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커피 아라비카 나무는 성숙한 뒤에도 길이가 10~12cm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잎의 폭이 로부스타에 비해 절반 정도로 좁다. 리베리카는 아라비카 및 로부스타와 달리 잎이 매우 넓고 타원형에 가까워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개화기는 늦은 여름부터 초가을이나 열대 지방에서는 일년 내내 꽃이 지속적으로 피며 열매가 달리고 수확을 한다. 커피 나무는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도 하며 이때 배양토는 밭흙과 부엽, 천사를 4: 4: 2의 비율로 혼합하여 재배한다. 반그늘에서 잘 자라고 16~30℃에서 잘 자란다. 섭씨 8도 이상에서 월동하며 환기를 요한다. 충분히 물을 주고 습도는 높게 관리한다. 커피의 번식은 종자 번식과 꺽꽂이 등 영양 번식을 겸할 수 있다. 추출 방식에 따른 커피 분류 드립커피. 물이 커피 층을 지나 커피잔에 담긴다. "크레마" 혹은 "스키우마"라고 불리는 검붉은 갈색의 거품과 함께 에스프레소가 추출되고 있다. 커피 드립 커피 이 부분의 본문은 드립 커피입니다. 드립 커피란 볶아서 갈은 커피 콩을 거름 장치에 담고, 그 위에 물을 부어 만드는 커피로 보통 원두커피로 불린다. 드립 브류라 함은 이와 같이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일컫는다. 거름 장치를 필터라고도 하기 때문에 드립 커피를 영어로 filtered coffee라고도 한다. 콜드 브루 이 부분의 본문은 콜드 브루 커피입니다. 콜드 브루 커피는 찬 물로 긴 시간에 걸쳐 추출한 커피 이다. 일본식 영어인 더치 커피는 '네덜란드의' '네덜란드 방식의' 커피라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더치커피의 유래가 대항해 시절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동남아 지역에서 커피를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동안에, 장기간에 걸친 항해 중에 커피를 먹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관련된 문헌은 전혀 없으며 사실상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러한 더치커피의 유래는 일본에서 마케팅을 이용해 만든 이야기로 실제로 네덜란드에서 '더치 커피'라 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다른 커피 추출법과 달리 찬물로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거나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커피보다 카페인이 많을 수도 있다. 카페인의 특성상 70도 이상에서 추출이 활발히 일어나지만 그 이하 온도에서도 추출이 일어나기 때문에 장시간 추출되는 더치의 특성상 충분한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디카페인 커피로 더치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추출 커피 이 부분의 본문은 에스프레소 및 비카입니다. 기계를 이용해 고압·고온 하의 물을 미세하게 분쇄한 커피 가루에 가해 추출해내는 고농축 커피이다. 머신 커피라고도 할 수 있다. 에스프레소, )가 대표적이다. 초창기 추출 커피는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에서 개발되었다. 당시 추출 커피는 순수하게 수증기의 압력으로 추출되었다. 1940년대 중반 스프링 피스톤 레버 머신이 개발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추출 커피가 제조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에는 대개 대기압의 9~15배의 압력을 가해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추출 커피의 가장 큰 특징은 드립 커피보다 농도가 짙다는 것이다. 같은 부피를 놓고 비교해 봤을 때 드립 커피보다 일정 부피 안에 용해된 고형체의 양이 많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카페인의 함유량이 적은데, 커피를 빠른 시간에 뽑아내기 때문이며, 추출 커피용 커피 콩이 드립용보다 카페인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의 espresso의 의미 역시 '고속의', '빠른' 이라는 형용사이다. 추출 커피는 주로 보통 내려 먹는 커피보다 강하게 볶은 커피를 쓴다. 커피 머신으로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흔히들 먹는 에스프레소는 1잔에 커피가루를 적게는 7g 많게는 20g 넣고 기계로 30~35ml를 25~35초 동안 내리는 것이다. 이보다 짧은 20~30초 동안 20~25ml의 양을 추출하는 리스트레또, 에스프레소 추출 방식으로 60~70ml를 뽑는 룽고, 에스프레소 두 잔을 한잔에 추출하는 도피오 도 있다. 바리스타에 따라 추출 방식은 제각각이다. 명칭 커피가루 추출 시간 추출량 비고 에스프레소 1단위 표준 30~35 기준 리스트레또 1단위 짧게 20~25 룽고 1단위 길게 40~45 더블 2단위 표준 30~35 도피오 2단위 길게 60~70 바리에이션 커피 여러 방법으로 추출한 커피를 그대로 음용하기 보단 다른 것을 섞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추출한 커피에 물을 일정량 혼합하여 마시는 카페 아메리카노와, 우유를 일정량 혼합하여 마시는 카페 라테가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머신 추출 커피와 더치 커피 로 표가 나뉘었다. 표에는 들어가는 재료에 한해 O 표기가 되어 있고, 사용하지 않으면 빈칸이다. 바리에이션 명칭 에스프레소 물 우유/스팀밀크 우유거품 초콜릿소스 카라멜소스 아이스크림 기타 에스프레소 O 에스프레소 콘 파냐 O 휘핑크림 에스프레소 마키야또 O O 카페 아메리카노 O O 카페 마끼아또 O O 카페 마끼아또 콘 캐러맬라 O O O 카페라떼 콘 캐러멜라 O O O 카페 콘 파나 O 생크림 카푸치노 로열 O 술 비엔나 O 생크림 카페 로얄 O 브랜디/꼬냑 아이리쉬 커피 O 위스키 티 카페 O 홍차/ 레몬 아포카또 O O 플랫 화이트 O O 카푸치노 O O O 카페 모카치노 O O O 카라멜 마키야또 O O O 카페 모카 O O O O 카페 라떼 O O O 미스 사이공 라떼 O O 연유 바리에이션 명칭 더치 원액 물 우유 스팀밀크 초콜릿소스 카라멜소스 아이스크림 기타 더치 O 더치 아메리카노 O O 더치 라떼 O O O 더치 아포카또 O O 더치 마키야또 O O 돌체 라떼 O O 연유 커피와 사회 이탈리아에서는 아침에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이 관례이고, 다른 시간대에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에 대해 어색하게 생각한다. 커피관련 직업 바리스타 기본적으로 커피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직업이다. '바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그 안에 물이나 우유, 시럽 등을 추가하여 음료를 만드는 직업이다.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여러 자격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바리스타 1, 2급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앞의 자격증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자격증이 민간자격증이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로스터 '커피를 볶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커피를 추출해 내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원두를 만드는 사람이다. 로스터는 아직 가공되지 않은 커피콩 즉, 생두를 원두로 만들기 위해 거치는 과정 로스팅을 하는 사람이다. 로스터가 되기 위해선 생두의 수확시기, 수분 함량, 조밀도, 종자, 가공방법, 특성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블렌더 커피는 원두의 종류가 다양하다. 각 종류마다 특유의 개성을 갖고 있다. 블렌더란 그 다양한 맛과 특성을 고려해 여러 종류의 원두를 혼합하여 맛을 내는 사람이다. 보통 로스팅을 하면서 블렌딩도 같이 하기 때문에 로스터와 블렌더는 같이 일을 하거나 한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커퍼 커퍼란 커피의 맛과 향, 특성이나 개성을 파악해 내는 사람이다. 생두의 등급을 매기는 일도 겸하며, 원산지를 구별해 내는 작업도 한다. 때문에 후각이나 미각의 의존도가 높다. 원산지의 기후와 재배방식을 공부하고 커피 맛에 영향을 끼치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파악하는 등 많은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큐그레이더 생두부터 로스팅이 끝난 원두까지의 전박적인 일을 총괄하는 직업군이다. 커퍼가 필요로 하는 등급을 매기거나 원산지를 구별하는 작업도 겸하며 생두부터 원두까지의 전체적인 등급을 매기는 사람이다. 가장 포괄적으로 일하는 직업이니 만큼 자격조건이 까다로우며, 미국스페셜티커피협회의 커피품질연구소에서 내는 아주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야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카페인 2005년 허리케인 리타가 미국 본토를 강타한 직후 미국 주방위군에 의해 주민에게 배포된 MRE. 오른쪽의 빨간봉지가 인스턴트 커피다. 이 부분의 본문은 카페인제입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100g의 커피 음료에는 40mg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커피 찌꺼기에는 경우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100g당 80.28mg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카페인은 중추신경을 자극시켜 잠을 쫓으며, 뇌 속의 도파민 농도를 증가시킨다. 카페인은 아데노신과 구조가 비슷하여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카페인의 민감도는 개인에 따른 차이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스턴트 커피는 일반적으로 원두커피보다 카페인이 더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원두커피는 드립, 에스프레소, 프렌치프레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음용 가능하기 때문에 함유된 카페인의 양은 단정할 수 없다. 카페인제는 피로를 완화 시키는데 사용된다. 대학교 학생, 트럭 운전사, 기타 보통보다 오랜 시간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 카페인제는 다이어트에도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이어트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해영 야구 해설위원은 커피 한 잔의 30배 정도 되는 카페인이 농축된 알약을 야구 선수들이 집중력 향상을 위해 먹는 것을 봤다고 말한다. 미국의 에너지 드링크는 제품에 따라 카페인 함유량이 50 - 500 mg으로 10배나 차이가 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1회용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했고, 이것이 유출되면서 커피가 대한민국에서 일반화 되었다. 미군 전투식량에는 인스턴트 커피가 들어 있었다. 당시 미군으로부터 유출된 인스턴트 커피는 카페인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 과음하면 불면증에 걸린다는 말이 있었다. 2003년의 이라크전에서 미군은 하루 4시간 정도밖에 허락되지 않는 수면부족에 의한 피로로 아군을 오인사살하기도 하며, 지상군 병사들은 동결건조한 인스턴트 커피 분말을 수시로 입안에 직접 털어넣으며 카페인의 힘을 빌어 졸음과의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브라운 대학교 연구팀은 카페인이 혈압에 있어서 단기적 상승을 유발할 수 있고, 동맥경화성 플라크를 유발하는 데 영향을 주는 교감신경 활동을 증가시켜 심장마비를 유발한다고 말했다. 특히, 거의 커피를 마시지 않고 간혹 마시는 사람들은 한 잔의 커피를 마신후 심장마비의 위험이 네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국가별 생산량 2012년, 세계 10대 커피 생산 국가와 생산량 순위 국가명 톤 자루 1 브라질 3,037,534 50,826 2 베트남 1,292,389 25,000 3 인도네시아 657,209 13,048 4 콜롬비아 464,640 9,927 5 페루 303,264 4,453 6 온두라스 300,000 4,537 7 에티오피아 275,530 6,233 8 과테말라 248,000 3,743 9 멕시코 246,121 4,327 10 우간다 186,126 3,878 자료 출처 -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2012 통계 소비량 이 부분의 본문은 일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에 따른 나라 목록입니다. 한국의 커피 시장 규모는 1조 3,976억원으로서 '07년 대비 10.5% 신장했으며, 종류별 구성은 커피 믹스가 60%,커피 음료가 26%, 인스턴트 커피가 11%, 원두커피가 3%를 차지함 흥밋거리 아이리시 커피는 위스키를 섞는다. 바흐는 당시의 커피 열풍을 반영하는 커피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커피는 사향고양이의 배설물로 만든 코피 루왁이다. 최근 북한에서도 여러 찻집과 커피 전문점이 점차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평양 중심가에 있는 '별무리' 카페는 에스프레소와 라떼, 카푸치노, 모카와 같은 커피를 미화 5달러에 받는데 이것은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 큰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비싸다. 게다가 북한에서의 5달러는 일반 노동자에게는 4-5일치의 봉급으로 상당히 비싼 것을 알 수 있다. 커피의 나라인 콜롬비아에서는 최대 인원 커피마시기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때의 인원은 1만 3800명 정도가 모여 동시에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한국의 커피체인점인 '카페베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커피 머그컵을 기네스에 등재하였다. 미국 펩시코 계열의 스낵회사 프리토레이는 얼마 전 자사 레이스 감자칩 라인업에 ‘카푸치노’맛을 추가했다. 그리고 세계최대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에서는 기네스 맛 커피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효능 남플로리다대학 연구팀이 커피 속에 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성분이 알즈하이머질환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커피에 있는 항암 성분이 암, 동맥 경화를 예방하고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 스위스의 커피과학정보연구소는 하루에 커피를 3∼5잔 마시면 알츠하이머 치매 위험을 최고 20%까지 줄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 보건 대학원 연구팀이 여성 6만7000명, 남성 5만 명을 대상으로 20여년에 걸쳐 실시한 조사 분석 결과 커피를 하루 4~6잔 마시면 자궁내막암과 전립선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한 잔의 커피에는 노화예방 및 세포산화 방지에 좋은 항산화 성분이 가득하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오렌지 주스보다 더 많은 수용성 식이섬유질이 풍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한 장 건강에 유익한 유산균의 활성화를 시키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리스 아테네대학교 연구팀이 고혈압 환자 485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하루의 한잔의 커피를 꾸준히 마시는 사람들의 경우 혈관의 탄력성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협압 환자는 혈관이 잘 경직돼 탄력이 떨어지고 심장병과 뇌졸중의 원인이 되는데 이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다. 또한 하버드 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커피를 마시면 당뇨병 위험이 남성은 50%, 여성은 30% 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밝혀졌다. 강릉원주대학교 연구팀이 하루 평균 2잔 ~ 5잔 사이의 커피를 마실 경우, 세포 증식과 면역력, 세포 방어, 항산화 신호 등에 유익한 단백질이 나타난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연구팀은 실험을 위해 투석시킨 커피 샘플과 카페인, 클로로제닌산 성분만을 이용한 인공적 커피 샘플을 각각 준비해서 실험한 결과, 투석된 커피 샘플을 마실 경우 세포증식, 면역력 향상, 세포 방어, 항산화 신호와 뼈 발상에 관여하는 단백질 표현에 좋은 반응이 나타났다. 단, 연구팀은 5잔을 초과한 10잔에서는 효능이 떨어졌다며, 과용하지 않을 것을 권고했다. 부작용 커피의 카페인 성분이 위산 분비를 촉진시켜 위가 안 좋은 사람에겐 커피가 속이 쓰리게 할 수 있다. 커피의 카페인 성분을 하루 500mg이상 섭취할 경우 불면증과 두통, 신경과민, 메스꺼움, 심혈관 증상등을 보인다. 각주 ↑ Pendergrast, Mark . “Coffee second only to oil?”. 《Tea & Coffee Trade Journal》. 2009년 12월 29일에 확인함. ↑ Villanueva, Cristina M; Kenneth P, Cantor; Will D, King; Jouni JK, Jaakkola; Sylvaine, Cordier; Charles F, Lynch; Stefano, Porru; Manolis, Kogevinas . “Total and specific fluid consumption as determinants of bladder cancer risk”. 《International Journal of Cancer》 118 : 2040–47. PMID 16284957. doi:10.1002/ijc.21587.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 가 나 Weinberg & Bealer 2001, 3–4쪽 ↑ “Budan Beans :: The Story of Baba Budan”. ↑ Meyers, Hannah . “Suave Molecules of Mocha—Coffee, Chemistry, and Civilization”. 《New Partisan》. New Partisan. 2011년 3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2월 3일에 확인함. ↑ Pankhurst, Richard . 《Economic History of Ethiopia》. Addis Ababa: Haile Selassie I University. 198쪽. ↑ Hopkins, Kate . “Food Stories: The Sultan's Coffee Prohibition”. 《Accidental Hedonist》. 2012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3일에 확인함. ↑ Oxford English Dictionary, 1st ed. "coffee, n." Oxford University Press , 1891. ↑ 일본어에서의 아테지 표기법 가운데 하나. 참고:フリーランス雑学ライダーズ編『あて字のおもしろ雑学』 p.125 1988年 永岡書店 ↑ 중국에서는 咖啡라고 부른다. ↑ 에티오피아는 70여 종족이 200여가지 언어를 사용하는데, 분나는 대다수 에티오피아인들이 사용하는 암하라어로 불리는 이름이다. 오로모어로는 "부나", 티그레어로는 "분", 케피초어로는 "보노"라 부른다.박종만 . 〈아프리카 커피의 희망을 보다〉. 《커피 기행 - 사막과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서 터키까지》 초판. 파주시: 효형출판. 122쪽. ISBN 9788958720522. ↑ 가 나 “Online Etymology Dictionary”. 《etymonline.com》. 2015년 11월 18일에 확인함. ↑ New England Coffee Company - Our Coffee ↑ A Brief History of Coffee p.68. ↑ 기쿠치 요시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다른세상, 2010, 235쪽. ↑ 한국커피전문가협회, 「바리스타가 알고 싶은 커피학」, 교문사, 16-20p ↑ “Coffee Expo Seoul 2013 to Provide Hub for Korea's Booming Coffee Market”. Asia Today. 2013년 2월 5일. 2013년 6월 24일에 확인함. ↑ 한국커피전문가협회, 「바리스타가 알고 싶은 커피학」, 교문사, 25-28p ↑ 원두커피를 영어로? ↑ http://www.edudaily.co.kr/news/view.html?section=80&category=127&no=17901 ↑ http://waitingcoffee.co.kr/220708060543 과거 내용 찾기])] ↑ http://www.work.go.kr/consltJobCarpa/srch/expThemeDetail.do?jobClcd=D&abnJobdptLrclId=D002&abnJobdptSmclId=10011&tabId=2 ↑ USDA. “Basic Report: 14209, Beverages, coffee, brewed, prepared with tap water”. 《National Nutrient Database for Standard Reference Legacy Release》. 2018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양영선, 이경운 . “커피 찌꺼기의 카페인이 식물을 죽인다”. 이뉴스 코리아. 2018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박정인 . “원두커피 VS 인스턴트 커피”. 밝은신문. 2018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Caffeine Pills: weight loss effects of the psychoactive stimulant”. 2008년 12월 3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5일에 확인함. ↑ “The Effect of Caffeine on Weight Loss”. 2009년 7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5일에 확인함. ↑ FAOSTAT DATABASE 2012 ↑ 북한에서도 차·커피 문화 유행...호텔, 찻집보다 140배 비싸 , 2014.12.02 ↑ 1만3800명! 동시에 커피마시기 기네스기록 수립, , 2013.10.07 ↑ 기네스 월드 레코드 등재되는 가장 큰 커피 머그컵 , 2014-07-17 ↑ 카푸치노 맛 감자칩·기네스 맛 커피…美 식품업계 '무한도전' , 2014.09.23 ↑ “카페인 든 커피 '알즈하이머치매' 예방 ”. 2011년 11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1일에 확인함. ↑ “커피 건강하게 마시는 노하우, 하루 2~3잔…치매 위험 줄인다 ”.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26일에 확인함. ↑ 커피 하루에 4~6잔 마시면 자궁암-전립선암 위험↓ ↑ Coffee & cardiovascular disease: Pharmacol Res. 2007, 한국커피전문가협회, 「바리스타가 알고 싶은 커피학」, 교문사 재인용 ↑ Dietary fiber in brewed coffee: J Agric Food Chem, 2007, 한국커피전문가협회, 「바리스타가 알고 싶은 커피학」, 교문사 재인용 ↑ Characterization of a new potential functional ingredient: coffee silver skin: J agric Food chem, 2004, 한국커피전문가협회, 「바리스타가 알고 싶은 커피학」, 교문사 재인용 ↑ 커피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도움…심장병·당뇨 등 예방 , 2014-07-10 ↑ 투/강릉원주대 ‘커피 마시면 유익한 단백질 발현’, 강원영동 문화방송, 2018년 10월 1일 ↑ 커피의 대표적인 두 성분이다. ↑ In vitro protein expression changes in RAW 264.7 cells and HUVECs treated with dialyzed coffee extract by immunoprecipitation high performance liquid chromatography, Scientific Reports, 2018년 9월 14일 ↑ 강석기 .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린 이유”. 《사이언스타임즈》. 2018년 9월 3일에 확인함. ↑ 장재선, 홍명선, 서화정. “대학생들의 커피에 대한 인식과 섭취행태가 효능 및 부작용에 미치는 영향”. 《한국식품영양학회지 v.29 no.2 pp.275~282》. CS1 관리 - 여러 이름 같이 보기 녹차 홍차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커피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커피 Bhanoo, Sindya N. . “The Secret May Be in the Coffee”. New York Times. 2013년 12월 4일에 확인함. Benjamin Joffe-Walt and Oliver Burkeman, The Guardian, September 16, 2005, "Coffee trail"—from the Ethiopian village of Choche to a London coffee shop. vdeh커피주제 경제학 공정 무역 역사 생산 커피 생산 커피 생산량에 따른 나라 목록 커피 벨트 종 및 변종 커피나무/아라비카 S795 커피 차리에리아나 리베리카 로부스타 성분 카페스톨 카페산 카페인 커피콩 가공 커피 로스팅 커피 폐수 디카페인 커피 홈 로스팅 준비 넉박스 달라 드립 모카 포트 시럽 에스프레소 머신 에어로프레스 인스턴트 저버나 제즈베 초레아도르 퍼콜레이터 커피메이커 진공식 콜드 브루 프렌치 프레스 핸드프레소 커피 음료 가로투 갈랑 까페 스어 다 까페 쯩 라테 마키아토 레드 아이 롱 블랙 뤼데스하이머 커피 리스트레토 리큐르 커피 마자그란 멜랑슈 밀크 커피 비체린 비카 아랍 커피 아이리시 커피 아이스 아인슈페너 아포가토 에스프레소 룽고 리스트레토 원앙차 이포 화이트 커피 인디언 필터 커피 카라히요 카스크 카페 데 오야 카페 라테 카페 마키아토 카페 모카 카페 샤케라토 카페 아메리카노 카페 오 레 카페 코레토 카페 콘 레체 카페 콘 판나 카페 콩 셰이리뉴 카페 투바 카푸치노 커피 우유 커피 튜브럭 코르타도 코피 루왁 쿠바 에스프레소 터키 커피 테놈 커피 프라페 프라푸치노 플랫 화이트 화이트 커피 관련 단체 목록 커피 기업 커피집 생활 양식 바리스타 카페 소스페소 커피 브레이크 커피 소스 커피 세레모니 커피콘 커피 문화 커피 커핑 커피 팰리스 커피집 피카 코피 티암 라테 아트 빈 카페하우스 대용품 보리차 베를레이컵 카로 치커리 민들레차 잉카 포스텀 키시르 그레인 커피 기타 커피와 도넛 커피 젤리 커피 잎녹병 커피의 제3의 물결 전거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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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3 0:999 수완 120\d | Since 2005 블루티쳐 영어학원, 임희재 | wayne.tistory.com | 01033383436 | 제작일 190805 13:57:44
수완 1400::Although a number of definitions of social loafing are available, the one proposed by Steven Karau and Kipling Williams is arguably the most complete. These authors define social loafing as the reduction in motivation and effort that occurs when individuals work on a collective task as opposed to coactive or individual tasks. Collective tasks are those that most people would intuitively call a group task. In collective conditions, individuals work with other group members toward a single goal. Thus, individual performance is pooled to produce the group's total performance. Conversely, individuals working in coactive conditions work in the presence of others, but each individual's work remains separate from that of others at all times. People working individually do not work in the presence of others, and their work remains separate from that of others.::비록 사회적 태만에 대한 많은 정의가 이용될 수 있지만, Steven Karau와 Kipling Williams가 제안한 것이 거의 틀림없이 가장 완벽하다. 이 저자들은 사회적 태만을 개인이 공동 작업이나 개별 작업이 아닌 집합적인 작업을 할 때 발생하는 동기와 노력의 감소라고 정의한다. 집합적인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집단 작업'이라고 부를 작업이다. 집합적인 환경에서는 개인들이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한다. 따라서 개별 성과는 집단의 전체 성과를 생산하기 위해 모아진다. 반대로, 공동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을 하지만, 각각의 개인의 일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일과 분리되어 있다.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하지 않으며, 그들의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일과 분리되어 있다.
수완 M1-20::Like our electronics' reliance on cloud storage, many companies are turning to crowdsourcing to solve complex problems. In this fluid staffing model, project teams come together like flash mobs of talent. They assemble, learn, contribute, and then disband. This model of work demands heightened levels of collaboration and learning. To contribute, individuals must swiftly ramp up their understanding of the situation, the problem, the players, the options, etc. They must then learn how to quickly assemble expertise, without the benefit of long-term relationships. When the flash of collective brilliance ends, they must let go and move on to the next rapid-learning, rapid-contribution cycle. Business strategist Jennifer Sertl has observed, "Our role as conduit is more vital than our role as source in this knowledge economy." Much like I found with my research for the book Multipliers, the critical skill of this century is not what you hold in your head, but your ability to tap into and access what other people know. The best leaders and the fastest learners know how to harness collectiveintelligence.::우리의 전자 기술이 클라우드 저장에 의존하는 것처럼, 많은 회사가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크라우드소싱에 의존하고 있다. 이 유동적 인사 관리 모형에서, 프로젝트팀들은 번개 모임에 모인 재능있는 사람들처럼 그룹을 형성한다. 그들은 집합하고, 배우고, 기여하고, 그리고 해산한다. 이 작업 모델은 높은 수준의 협력과 학습을 요구한다. 기여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은 상황, 문제, 참가자들, 선택 가능 항목들 등등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빠르게 증가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오래된 관계에서 오는 이점이 없는 상태에서, 빠르게 전문적 지식을 모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뛰어난 집단 재능의 번득임이 끝나면, 그들은 해산하여 그 다음 빠른 학습, 빠른 기여 사이클로 옮겨 가야 한다. 사업 전략가인 Jennifer Sertl은 "이 지식 경제에서는 전달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이 공급원으로서의 우리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Multipliers'라는 책을 쓰기 위한 나의 연구에서 내가 발견한 것과 아주 흡사하게, 이 세기의 중요한 기술은 여러분의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접근하는 능력이다. 최고의 지도자와 가장 빠른 학습자는 집단 지성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수완 M3-32::We often think that our ethical missteps are just small ones that don't really affect anyone else. We are not thinking through the consequences of our actions when we rationalize rather than analyze ethical issues in this manner. For example, it is probably true that one person who misrepresents his or her income on a mortgage application is not going to undermine the real estate market. However, if everyone believes his or her misrepresentation on a mortgage application is singular and isolated, we end up with a great many mortgages in default, a glut of foreclosures, and a collapsed housing market. We lived through these systemic effects, beginning in 2007, as the mortgage market collapsed. In analyzing ethical issues, we turn to Kant and other schools of thought and ask, "What if everyone behaved this way? What would the world be like?" Good ethical analysis requires a look at the impact of collective individual behaviors on the system.::흔히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 실수가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저 작은 윤리적 실수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윤리적 사안을 분석하지 않고 합리화할 때 우리는 우리 행동의 결과를 충분히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담보 대출 신청서에 자신의 소득을 거짓으로 기술하는 한 사람이 부동산 시장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사람이 담보 대출 신청서에 있는 자신의 거짓된 기술이 단 하나뿐이고 단 한 번뿐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결국 엄청나게 많은 채무 불이행 상태의 담보 대출, 담보권 행사의 과잉, 그리고 주택 시장 붕괴를 겪게 된다. 담보 대출 시장이 붕괴했을 때인 2007년 초반에 우리는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이 효과를 겪었다. 윤리적 사안을 분석할 때 우리는 칸트와 다른 학파들에 의지하여 "만약 모든 사람이 이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어떨까? 세상은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다. 타당한 윤리적 분석은 집단적 개별 행동이 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수완 M5-34::One consequence of the separation of music from words is to render the meaning of music equivocal. Because words define its content, we know what we are intended to feel when we hear a song in a language with which we are familiar; but we cannot be as sure when we hear a symphony. Disputes about the meaning of music, which are still heated, are centered around 'absolute' music: that is, they concern instrumental music which does not refer to anything outside itself. When music accompanies words, or is closely associated with public events such as triumphs or funerals, questions of its meaning hardly arise. We know what we are expected to feel, and we usually feel it. Music adds significance to ceremonies and to words because it induces arousal and structures that arousal in a way that ensures collective participation.::음악과 가사를 분리하는 것의 결과 중 하나는 음악의 의미가 애매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사가 음악의 내용을 정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를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지 안다. 하지만 우리가 교향곡을 들을 때는 그만큼(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를 들을 때만큼)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한창 진행 중인 음악의 의미에 대한 논쟁은 '절대' 음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즉, 그것은 음악 외의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는 기악곡과 관련된다. 음악이 가사를 동반할 때, 또는 개선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공공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될 때, 그것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도록 기대되는지 알며, 보통 그것을 느낀다. 음악은 각성을 유발하고 그 각성을 집단적 참여를 확실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조화하기 때문에, 의식과 가사에 의미를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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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ve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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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to be confused with wisdom of the crowd.
Collective wisdom, also called group wisdom and co-intelligence, is shared knowledge arrived at by individuals and groups.
Collective intelligence, which is sometimes used synonymously with collective wisdom, is more of a shared decision process than collective wisdom. Unlike collective wisdom, collective intelligence is not uniquely human, and has been associated with animal and plant life. Collective intelligence is basically consensus-driven decision making, whereas collective wisdom is not necessarily focused on the decision process. Collective wisdom is a more amorphous phenomenon which can be characterized by collective learning ove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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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edit]
Collective wisdom, which may be said to have a more distinctly human quality than collective intelligence, is contained in such early works as The Torah, The Bible, The Koran, the works of Plato, Confucius and Buddha, Bhagavad Gita, and the many myths and legends from all cultures. Drawing from the idea of universal truth, the point of collective wisdom is to make life easier/more enjoyable through understanding human behavior, whereas the point of collective intelligence is to make life easier/more enjoyable through the application of acquired knowledge. While collective intelligence may be said to have more mathematical and scientific bases, collective wisdom also accounts for the spiritual realm of human behaviors and consciousness. Thomas Jefferson referred to the concept of collective wisdom when he made his statement, "A Nation's best defense is an educated citizenry". And in effect, the ideal of a democracy is that government functions best when everyone participates. British philosopher Thomas Hobbes uses his Leviathan to illustrate how mankind's collective consciousness grows to create collective wisdom. Émile Durkheim argues in 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 (1912) that society by definition constitutes a higher intelligence because it transcends the individual over space and time, thereby achieving collective wisdom. 19th century Prussian physicist Gustav Fechner argued for a collective consciousness of mankind, and cited Durkheim as the most credible scholar in the field of "collective consciousness". Fechner also referred to the work of Jesuit Priest Pierre Teilhard de Chardin, whose concept of the noosphere was a precursor to the term collective intelligence. H.G. Wells's concept of "world brain", as described in his book of essays with the same title, has more recently been examined in depth by Pierre Lévy in his book, The Universe-Machine: Creation, Cognition and Computer Culture. Howard Bloom's treatise "The Global Brain: The Evolution of Mass Mind from the Big Bang to the 21st Century" examines similarities in organizational patterns in nature, human brain function, society, and the cosmos. He also posits the theory that group selection directs evolutionary change through collective information processing. Alexander Flor related the world brain concept with current developments in global knowledge networking spawned by new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in an online paper, A Global Knowledge Network.[1] He also discussed the collective mind within the context of social movements in Asia in a book Development Communication Praxis.[2]
Dave Pollard's restatement of Collective wisdom:
"Many cognitive,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problems are best solved by canvassing groups (the larger the better) of reasonably informed, unbiased, engaged people. The group's answer is almost invariably much better than any individual expert's answer, even better than the best answer of the experts in the group."
Contemporary definition and research[edit]
Harnessing the collective wisdom of people is an area of intense contemporary interest and cutting-edge research. The application of the term to methodologies that are designed to harness collective wisdom is credited to the work of Alexander Christakis and his group,[3][4] As the challenges society faces today are of extreme complexities, the only solution is to develop technologies capable of harnessing the Collective Intelligence and collective wisdom of many people, or even crowds. The Institute for 21st Century Agoras founded in 2002 by Alexander Christakis, the Wisdom Research Network of the University of Chicago[5] launched in 2010 and the MIT Center for Collective Intelligence founded by Thomas W. Malone in 2007 are some examples.
Collective Wisdom Initiative[edit]
The Collective Wisdom Initiative was formed in 2000 with the support of the Fetzer Institute for the purpose of gathering material on the research, theory and practice of collective wisdom. It was a collaboration of practitioners and academics in areas such as business, health care, mental health, education, criminal justice and conflict resolution.[6] Several of the founding members subsequently co-authored The Power of Collective Wisdom. In this, six stances or principles, which support the power of collective wisdom are presented: deep listening, suspension of certainty, seeing whole systems/seeking diverse perspectives, respect for other/group discernment, welcoming all that is arising, and trust in the transcendent.[7]
Two strands of thought relating to collective wisdom follow very different paths. The first suggests that aggregates of people and information will succeed in advancing wisdom, that wisdom is built on the accumulation of data and knowledge, without a need for judgement or qualification. Some have faulted this belief for failing to take into account the importance of 'adaptive assessment'.[8]The second argues that wisdom is only possible in reflective states of mind, including meta cognition. According to Alan Briskin, wisdom requires systematic reflection on the inner self and the outer states of social order. Mark Baurelein has made the case that the hyper communication of knowledge has hobbled rather than promoted intellectual developmen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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